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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의 8개 지레목…중원·변방 잇는 길마다 천하 절경

중앙선데이 2019.10.12 00:20 656호 28면 지면보기

윤태옥의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태항 팔형(八陘)

태항 팔형의 하나인 백형. 기원전 550년 제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할 때 통과했던 길이다. [사진 윤태옥]

태항 팔형의 하나인 백형. 기원전 550년 제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할 때 통과했던 길이다. [사진 윤태옥]

태항산의 서쪽이라 산서(山西·산시)고 동쪽이라 산동(山東·산둥)이라고 한다. 서쪽은 산시고원이 펼쳐지고 동쪽은 탁 트인 화북평원이 지평선을 한참이나 그리다가 황해에 다다른다. 태항산은 베이징의 시산(西山)에서 시작하여 황하 북안의 왕우산(王屋山)까지, 남북으로 400여㎞나 뻗은 산맥이다. 산시고원은 해발 800m 이상이고, 동쪽의 화북평원은 해발 50m 이하이다. 그리하여 태항산은 물길을 동서로 가르지 않고 계곡으로 틈을 내어 서에서 동으로 흘려보낸다. 강이 산맥을 가로지른다.
 

태항산 서쪽은 산서, 동쪽은 산동
남북 400㎞ 뻗은 산맥엔 협곡·초원

중원 농경 vs 서북 유목 세력 충돌
북방 호족에겐 중원 노린 돌파선
중원 입장에선 호족 저지 방어선

최근 한국인들의 중국여행에서 태항산은 인기가 높다. 상상을 뛰어넘는 깊은 협곡과 산상 대지에 펼쳐진 기묘한 풍광들이 여행객들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중국에서도 수많은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중국의 전통 산수화를 남북으로 나눈다면 북화는 태항산의 절경을 담아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남단 지관형 북쪽 왕우산은 도교 성지
 
역사로 보면 산시 지역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남북 혼거지역이었고, 태항산은 중원의 농경세력과 서북의 유목세력이 충돌하고 접변하는 경계였다. 서북 세력이 산시를 차지하면 태항산 계곡을 통과하여 화북평원으로 쏟아져 내려갔다. 낙양·업성·개봉·정주 등 중원의 한복판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중원의 힘이 태항산 계곡을 거슬러 산시를 장악하면 몽골초원까지 거침없이 내달을 수 있었다. 북방 호족(胡族)들에게는 물산이 풍부한 중원을 노리는 돌파선이었고, 중원에서는 그들을 저지하는 방어선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산맥에는 능선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지레목[陘(형)]이 있고 그곳에는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길이 나면 사람과 물산이 오갔고 시간이 쌓이면 역사가 흘렀다. 태항산에는 중원과 변방이 통하는 여덟 개의 지레목이 있으니 이를 태항 팔형(八陘)이라 한다. 나는 지난여름 역사학자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여덟 개의 지레목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답사여행을 했다.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풍성하고도 값진 여행이었다. 가장 남쪽의 제1형은 지관형(軹關陘)이다. 허난성 지위안시에서 산시성 허우마시로 넘어가는 길이다. 지(軹)는 지위안에 있던 춘추시대의 나라 이름이다. 지위안시 남쪽에 지청진이란 마을에 지국고성의 성벽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태항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왕우산이 나온다. 도교의 성지로 유명하다. 지관형은 춘추시대 진나라가 중원으로 오가던 길이었으니 패자(覇者) 진문공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2형은 태항형이다. 허난성 친양시 창핑촌(常平村)에서 산시성 진청시 쩌저우현 완청촌(碗城村)의 천정관(天井關)까지 238번과 333번 성도다. 이 구간은 해발 1500m 정도로 능선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능선 좌우로는 경사가 심해 인마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 보였다. 전국시대 진(秦)이 조(趙)와 벌였던 장평지전(기원전 260년)에서 진의 주요 공격루트였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진나라 군대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30만이 죽었고, 패배한 조나라는 45만이 참수나 갱살(坑殺)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산시성 초입에 천정관의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허난성 쪽에서는 공사를 위해 도로를 폐쇄했다. 폐쇄한 덕분에 텅 비게 된 산길은 쾌적한 드라이브나 느긋한 도보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백형에 남아 있는 산길. [사진 윤태옥]

백형에 남아 있는 산길. [사진 윤태옥]

제3형은 백형(白陘)이다. 허난성 후이셴시의 남관산(南關山)에서 산시성 링촨현의 마거당(馬圪當)과 훙더우산(紅豆杉) 대협곡으로 이어지는 백여㎞의 깊은 협곡길이다. 기원전 550년 제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할 때 통과했다는 그 길이다. 
 
백형은 협곡 위아래로 1000여m의 고도 차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형 가운데 가장 깊은 계곡이다. 일부 구간에서는 옛 산길을 느긋하게 걸으면서 옛길의 정취와 협곡의 장관을 두어 시간이나 만끽할 수 있다. 남관산은 요즘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가는 태항산 가운데 운태산(雲台山) 바로 북쪽에 접한 산이다. 남관산에서 후이셴시로 내려가는 하산길에서는 화북평야의 지평선을 훤히 볼 수 있다.  
 
팔형의 네 번째는 부구형(㵚口陘)이다. 허베이성 한단시 펑펑쾅구 시즈팡촌(西紙坊村)에 부구형 표지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약간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태항산으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으로 진행하여 창즈시(長治市)에 이르는 길이다. 남북조 시대의 북제(550~577년)는 국도(鄴都, 지금의 허난성 한단시 린장현)와 배도(晉陽, 지금의 타이위안시 진위안구) 두 개의 수도를 운영했다. 부구형은 이 두 수도를 잇는 국가 운영의 핵심적인 교통로였고, 교역도 활발했다. 지금도 22번 고속국도가 서현을 거쳐 창즈시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 정형(井陘)은 예나 지금이나 산시성 수도 타이위안과 허베이성 수도 스자좡을 연결하는 간선이다. 태항산 산길은 핑딩현에서 징싱현까지다. 핑딩현의 낭자관, 톈창진의 당송고성, 징싱현의 동천문과 진황고역도를 하나하나 찾아볼 만하다. 낭자관은 당고조의 딸인 평양공주가 낭자군을 이끌고 지켰다는 관문이다.
 
여섯 번째 비호형(飛狐陘)과 일곱 번째 포음형(蒲陰陘)은 ㅗ자 형태로 이어진 길이다. 포음형은 산시성 다퉁(북위의 평성) 링추, 허베이성 라이위안을 거쳐 베이징 서남부인 팡산구로 연결되는 길이다. 링추(靈丘)를 지나는 길이라 영구도라고도 한다. 지난달의 탁발선비 이야기에서 북위의 평성시대를 언급한 바가 있었다. 3대 황제 태무제가 북중국을 통일했을 때 바로 이 길이 정복의 길이었다. 2014년 가을 이곳을 처음 찾았었고 인근의 각산사에서 4대 문성제가 남긴 비석 실물을 찾아서 볼 수 있었다. 그때에도 동행했던 박한제 교수의 감회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활을 쏜 그 자리에는 어사대라는 표지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주변을 잘 정리하여 말끔한 산중 소공원이 되어 있다.
  
지금은 종횡으로 고속도로도 관통
 
태항 비호형. 포음형과 ㅗ자 형태로 이어져 있다.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운 길이다.

태항 비호형. 포음형과 ㅗ자 형태로 이어져 있다.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운 길이다.

팔형 가운데 일곱 개는 동서 방향이지만 비호형은 남북으로 난 길이다. 허베이성 위현(蔚縣)에서 라이위안현(淶源縣)으로 내려와 포음형과 만난다. 비호형은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세력이 베이징을 공략할 때 우회하는 침투로가 되기도 했다. 비호형은 협곡 바닥의 길이고 협곡 위로는 공중초원으로 잘 알려진 멋진 산상 초원이 펼쳐져 있다. 좁은 협곡 사이의 2차선 도로를 느긋하게 걸을 수도 있다.
 
마지막 팔형은 군도형(軍都陘)이다. 베이징 서북 외곽에서 장자커우 후허하오터로 이어지는, 북방초원으로 바로 닿는 고갯길이다. 베이징 인근의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팔달령(八達嶺)과 거용관(居庸關)이 바로 군도형의 일부이다. 베이징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엄중하게 지키는 길이다. 북방세력이 군도형을 뚫지 못하면 비호형 포음형을 거쳐 우회하여 베이징을 공략했던 것이다.
 
길은 사람이 오가고 세월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태항산, 지금은 종횡으로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21세기 역사를 현기증 나도록 휘갈겨 써가고 있다. 현대 이전의 느릿해 보이는 역사는 팔형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봄은 황사가 심하니 여름이나 가을에 태항산 계곡에서 팔형의 역사를 음미하며 걸어보는게 어떻겠는가.
 
윤태옥 중국 여행객

윤태옥 중국 여행객

윤태옥 중국 여행객
윤태옥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중국식객』『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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