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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가대표팀에 한국인이?…'다국적 경기' 럭비의 매력

중앙일보 2019.10.10 07:00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31)

외국에서 살다 보면 '한국인' '한국계' '한국 출신'이란 말에 민감해진다. 뉴스에서 거론되는 유명인이라면 더더욱 관심이 간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선수, 혹은 외국 실업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외국살이하는 이에게 용기를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선수는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였다. 원래 피겨스케이팅을 좋아하기도 해서 대회가 있는 날이면 중계방송 전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하고 집중해서 봤다. 그것만으로도 생활에 탄력이 생겼다.
 
9월 20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에서 열리는 2019 럭비 월드컵. [사진 럭비 월드컵 페이스북]

9월 20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에서 열리는 2019 럭비 월드컵. [사진 럭비 월드컵 페이스북]

 
'2019 럭비 월드컵'이 9월 20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에서 개최되고 있다. 일본은 러시아, 아일랜드, 사모아전을 이겨냈다. 러시아와의 첫 경기 날, 우리 집 거실에서는 큰아들이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겼다. 아일랜드와의 경기 중계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세계 랭킹 10위인 일본이 세계 랭킹 1위인 아일랜드에 이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팀은 이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인 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아깝기 그지없다.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을 놓쳤다.
 
일본 럭비 국가대표 구지원. 한국 국가대표를 지낸 아버지 구동춘 씨도 혼다팀에서 활약했고, 형인 구지윤 선수도 현재 혼다팀 소속이다. [사진 구동춘]

일본 럭비 국가대표 구지원. 한국 국가대표를 지낸 아버지 구동춘 씨도 혼다팀에서 활약했고, 형인 구지윤 선수도 현재 혼다팀 소속이다. [사진 구동춘]

 
어느 날 페이스북에 일본팀에 한국 출신 선수가 있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어리둥절했다. 럭비 국가 대표팀 선발 조건이 '국적'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 선수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무얼 숨기리, 나는 스포츠 문외한이다. 조금이라도 럭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 실업팀 '혼다'에 한국 선수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선수의 이름은 구지원(25세, Honda Heat 소속, 포지션은 플롭)이다.
 
사진을 보니 보조개가 귀여운 선수다. 가족 내력을 보면 한국 국가대표를 지낸 아버지 구동춘 씨도 혼다팀에서 활약했고, 형인 구지윤 선수도 현재 혼다팀 소속이라고 한다.
 
럭비팀의 규칙을 모르면 '저게 일본팀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양한 인종의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상세히 알아봤다. 럭비 월드컵대회는 축구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달리 국적이 없어도 대표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1. 본인이 해당국에서 태어난 경우
2. 부모나 조부모 중에 해당국 출신자가 있는 경우
3. 해당국에 3년 이상 계속해서 거주한 경우(2020년 말부터는 5년으로 연장된다)
이상의 조건 중에 하나 이상을 만족시킨 뒤,
4. 해당국 이외의 국가대표로 공식 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없는 경우다.
 
이러한 독특한 규칙이 적용되게 된 연유는 대영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럭비의 발상지다. 대영제국은 식민지에 럭비를 알렸다. 그리고 식민지 출신이라도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든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나라 출신의 선수들이 같은 유니폼과 앰블럼을 달고 시합에 임한다. 2015년에 이어 두 번째 캡틴을 맡은 리치 마이켈(Michael Leitch)은 뉴질랜드 출신이며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계 뉴질랜드인, 어머니는 피지 출신이다. 고등학교 때에 일본으로 왔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이 선수만 봐도 벌써 4개국의 루트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럭비 국가 대표팀은 그야말로 '다국적·다문화'팀이다. 일본, 한국, 통가,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호주, 사모아 출신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일본팀만의 특징은 아니다. 다른 나라 팀도 대부분이 다국적 팀이다. 그야말로 '지구촌의 럭비팀'이라고 해야 하지 싶다.
 
일본대표팀 최종등록 선수는 31명이다. 선수 구성을 보면 일본 출신 선수가 15명, 외국 출신은 16명이고 이 중 외국 국적인 선수가 7명이다. 반 이상이 외국 출신 선수인 셈이다. 그중에 한국의 구지원 선수도 들어있다. 구지원 선수는 초등학교 때는 럭비 강국인 뉴질랜드에 유학 경험이 있고, 중학교 2학년 때에 일본으로 건너와 고등학교와 대학 럭비부에서 실력을 쌓았다.
 
럭비 일본팀 유니폼. 럭비 국가대표팀은 가슴에 국기를 달지 않고 앰블럼을 단다. 올림픽은 ‘국적주의’이지만 럭비는 '협회주의’를 택하고 있다. 각 지역의 럭비 협회에 소속하는 선수는 국적에 상관없이 대표선수가 될 수 있다. [사진 양은심]

럭비 일본팀 유니폼. 럭비 국가대표팀은 가슴에 국기를 달지 않고 앰블럼을 단다. 올림픽은 ‘국적주의’이지만 럭비는 '협회주의’를 택하고 있다. 각 지역의 럭비 협회에 소속하는 선수는 국적에 상관없이 대표선수가 될 수 있다. [사진 양은심]

 
이번 월드컵에서는 지금까지 세 경기 중 러시아전과 아일랜드전에 출전했다. 13일 일요일에는 스코틀랜드전이 있다. 여기서 이기면 8강 진출이다. 구지원 선수 출전을 장담할 수는 없으나 출전하지 않더라도 나는 응원할 것이다. 한국인 선수가 한 명 포함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팀은 '우리 팀'이 되었다.
 
2015년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럭비 월드컵 경기는 일본에 럭비 붐을 일으켰다. 럭비를 모르는 일반인들까지 흥분했었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외국인인 나까지 말이다. 스타 선수의 탄생이 부른 효과이기는 했지만, 꾸준히 럭비 문화를 이어온 바탕이 있어서일 것이다.
 
럭비 월드컵의 규칙은 대영제국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계의 경계선이 낮아지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주 선진적인 규칙이 아닐까 싶다. 다국적·다문화 선수로 구성되는 각국 국가팀은 국제화 사회의 좋은 모델이다. 그들의 활약을 통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사회를 만드는 힌트를 배웠으면 한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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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심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필진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살림을 꾸린지 약 25년. 일본으로의 이주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한다. 한일자막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다. ‘한일 양국의 풀뿌리 외교관’이라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보다도 더 비빌 언덕이 없는 일본에서 그 사회에 젖어 들고, 내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과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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