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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와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세종대왕

중앙선데이 2019.10.08 15:33
 
 

[유주현기자의 컬처 FATAL]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발길 닿는 곳마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흔적이 넘쳐난다. 미술관이나 극장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거리거리에 즐비한 기념품 숍에는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를 활용한 기념품이 대부분이다. 
일본 최남단의 역사도시 가고시마에 가면 우리에게 ‘정한론’으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거의 아이돌급이다. 티셔츠부터 단무지까지 그의 얼굴이 박혔다. 그가 데리고 다니던 애견까지 동상으로 또 인형으로 제작돼 친근감을 더한다. 메이지 유신 3걸 중 대장격이지만, 하급 무사들과 끝까지 운명을 함께 했던 인간미가 후대에도 길이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조상 덕에 먹고 산다’는 말도 있지만, 이런 풍경을 보면 역사적 인물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클림트가, 사이고 다카모리가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한 도시의 상징물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긴 세월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 무대, 전시 등의 문화 콘텐트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조금씩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일 게다.  
 
지난해부터 10월 27일까지 제주도에서 전시중인 '빛의벙커:클림트전' [사진 뉴시스]

지난해부터 10월 27일까지 제주도에서 전시중인 '빛의벙커:클림트전' [사진 뉴시스]

우리에게 이 정도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아마 세종대왕이 대표적인 인물 아닐까. 하지만 세종대왕마저도 오랜 세월 동안 위인전 속 ‘위대한 임금’으로 추앙되며 구름 위의 존재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정통 사극 속 위엄 넘치는 임금에게 친근감 따윈 없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한글 창제에 관한 팩션 소설, 드라마가 속속 나오며 세종에 대해 친근감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올해도 한글창제 과정을 독특한 해석으로 풀어낸 영화 ‘나랏말싸미’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방송된 NHK대하드라마 '세고돈'.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인공이다. [사진 NHK홈페이지]

지난해 방송된 NHK대하드라마 '세고돈'.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인공이다. [사진 NHK홈페이지]

뮤지컬 ‘세종 1446’(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12월 1일까지)도 그런 콘텐트 중 하나다. 세종대왕릉이 있는 여주시가 지난해 세종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창작뮤지컬이다. ‘파리넬리’‘빈센트 반 고흐’‘라흐마니노프’ 등 창작뮤지컬에 잔뼈가 굵은 제작사 HJ컬처와 공동제작했다. 해외 유명 라이선스 작품 일색인 대극장 뮤지컬계에 흔치않은 우리 역사 소재 뮤지컬이란 점부터 이목을 끈다.  
 
뮤지컬 '세종 1446' [사진 HJ컬처]

뮤지컬 '세종 1446' [사진 HJ컬처]

온국민이 존경하는 세종대왕을 소재로 했다고 쉽게 성공을 점칠 수는 없다. 오히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세종대왕에게서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것인가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실패만 봐도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뮤지컬 매니어를 위한 작품은 아니다. 화려한 라이선스 대극장 무대에 익숙한 눈으로는 만듦새가 썩 돋보이지는 않는다. 완급 조절을 잊은 듯 시종일관 휘몰아치는 전개와 줄곧 빵빵 터지는 웅장한 음악은 다소 피로감을 준다. 
하지만 장지문 패널을 활용한 창의적인 무대전환, 해금·대금 등 국악기 선율을 적소에 얹은 라이브 연주, 무관들의 공중제비 등으로 박진감 넘치게 표현된 앙상블 군무 등 볼거리·들을거리는 대극장 규모에 걸맞게 충실했다.
뮤지컬 '세종 1446' [사진 HJ컬처]

뮤지컬 '세종 1446' [사진 HJ컬처]

 
그런데 이 무대의 미덕은 따로 있다. 세종을 구름 위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한글창제의 위업은 작품의 극히 일부다. 왕이 될 꿈도 꾸지 않고 서책에 파묻혀 지내던 충녕대군 시절부터 아버지 태종과 대신들에게 억눌려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젊은 날의 고뇌가 부각된다. 과학자 장영실을 중용했다가 사대주의자들과 대립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후, 실명의 고통 속에서도 오직 ‘애민정신’ 하나로 한글 창제에 몰두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그려진다. 세종도 날 때부터 위대한 임금이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며 성장통을 겪었던 인간이었던 것이다.
 
뮤지컬 '세종 1446' [사진 HJ컬처]

뮤지컬 '세종 1446' [사진 HJ컬처]

객석엔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관객층이 함께 하고 있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적 인물을 친근하게 끌어당기는 문화 콘텐트를 통해 뮤지컬을 보지않던 관객층까지 포섭하고 있는 모습이 퍽 희망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노트부터 에코백까지 다양하게 판매중인 MD굿즈를 사는 사람은 목격하지 못했다. 클림트와 사이고 다카모리에겐 있고 세종대왕에겐 없는 게 뭘까? 대답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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