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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이 산다" "벌써 떠났다" 의사당서 논쟁하는 이 나라

중앙일보 2019.10.08 13: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31)

아일랜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요정은 옛날 이야기, 동화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존재이다. 장난치고 심술도 부리는 존재. 요정을 위한 집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박재희]

아일랜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요정은 옛날 이야기, 동화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존재이다. 장난치고 심술도 부리는 존재. 요정을 위한 집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박재희]

 
“잠깐! 그 문은 열면 안 돼. 요정들이 다니는 문이야.”
 
다급하게 달려와 앞을 막아선 레베카는 손잡이에서 내 손을 떼어냈다. 초록색 모자를 쓰고 멋쟁이 재킷을 입은 레프러칸(Leprechaun: 아일랜드의 대표 요정)이 그려진 유리문이 말 그대로 ‘요정 전용’ 출입문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손을 모아 레프러칸 요정에게 실례했다고 사과한 후 뒤로 물러섰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일랜드에서 한 달쯤 보내면 그렇게 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요정을 믿는다. 아니, 아일랜드에는 요정이 산다. 대문에 우체통처럼 요정 집을 걸어 놓은 집도 많고 정원 구석에 작은 요정의 집을 숨겨 두거나, 숲속, 나무에도 요정이 쉴만한 집을 지어준다. 달에 가고 화성을 탐사하는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시대를 함께 사는데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요정들이 사는 숲을 지키기 위해 고속도로 설계를 변경한다.
 
요정이 길을 잃을까봐 표지판도 세워둔다. 산악도로에서 만난 아일랜드 아이들.

요정이 길을 잃을까봐 표지판도 세워둔다. 산악도로에서 만난 아일랜드 아이들.

 
“요정 숲을 파괴해서 레프러칸 들이 갈 곳이 없어지면 저주를 받을게 뻔한데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의사당에서 의원들은 클레어(Clare) 지역의 페어리 숲에서 요정들이 일하는 모습을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요정들이 그 숲을 이미 떠났다는 사람들로 나뉘어 싸웠다고 했다. “요정이 어디 있어? 그걸 진짜 믿는단 말이야?” 가 아니라 ‘아직 거기 산다’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로 나뉘었다니, 게다가 의사당에서 이런 논쟁을 한다니.
 
아일랜드에 오기 전에는 물론이고 여행하면서도 이런 요정 믿음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큰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세우고도 요정 논쟁으로 일정을 연기하고 계획을 변경하는 나라, 산악도로에서 요정들이 길을 잃을까 봐 표지판을 세워주는 나라. 그러니 레프러칸만 다닐 수 있는 전용 출입문쯤이야 놀랄 일도 아니다.
 
킨세일(Kinsale) 서점에는 요정만 드나드는 전용문이 있다. 초록 모자에 초록 자켓, 아일랜드 대표 요정 레프러칸(Leprechaun)이다.

킨세일(Kinsale) 서점에는 요정만 드나드는 전용문이 있다. 초록 모자에 초록 자켓, 아일랜드 대표 요정 레프러칸(Leprechaun)이다.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에 안내소를 세우냐 마느냐 논쟁도 족히 백 년은 걸린 듯 해.”
 
관광지 가운데 최고라고 꼽히는 모허는 약 3억년 전 얕은 바다 속 석회암 기단 위에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최고높이 200미터가 넘는 절벽이다. 대서양을 마주한 절벽이 8km까지 이어지는 웅장한 절경에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인기 관광지에 당연히 안내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모허의 절경을 해치는 어떤 건물도 세울 수 없다고 반대하는 의견이 오랫동안 팽팽했다고 한다.
 
모허절벽의 관광 안내시설은 자연경관, 스라이라인을 침해하지 않고 땅굴처럼 반 지하 형태로 지어졌다.

모허절벽의 관광 안내시설은 자연경관, 스라이라인을 침해하지 않고 땅굴처럼 반 지하 형태로 지어졌다.

 
모허 절벽에 도착해서 내가 목격한 그들의 해결책은 참으로 근사했다. 아득하게 펼쳐진 절벽과 오른쪽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하늘과 대서양이 그대로 만난다. 절벽과 바다를 향해 달리는 시선에 걸리는 인공 구조물은 전혀 없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풍광을 그대로 두는 방법을 택했고 고심끝에 택한 방법이 감동이다.
 
낮은 언덕에 땅굴처럼 파내는 방식으로 안내시설을 지었다. 부러움 다른 한편으로 한국사람들이 빨리빨리 뚝딱 유전자로 해치우는 일들이 떠올라 맘이 아파왔다. 강을 막아 세워놓고 ‘리버뷰’, 언덕을 모두 가리는 ‘힐사이드’, 바다를 보려면 지나야 하는 건물 ‘오션뷰’를 고민없이, 눈 한번 깜짝 안하고 지어 올리는 개발 망령 말이다.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은 3억년 전 얕은 바다였다. 석회암에 퇴적층이 쌓여 200M가 넘는 높이로 8km에 이르는 절벽이다. 아일랜드 최고의 관광명소중 하나.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은 3억년 전 얕은 바다였다. 석회암에 퇴적층이 쌓여 200M가 넘는 높이로 8km에 이르는 절벽이다. 아일랜드 최고의 관광명소중 하나.

모허 절벽에는 별다른 안전시설도 없다. 정벽 자체가 미끄러워 추락 사고도 적지 않고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 충동을 자제하라는 안내판도 걸려있다. 자살 절벽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모허 절벽에는 별다른 안전시설도 없다. 정벽 자체가 미끄러워 추락 사고도 적지 않고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 충동을 자제하라는 안내판도 걸려있다. 자살 절벽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요정이 사는 숲을 보전하고자 고속도로 계획을 수정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믿는 사람들은 며칠 올림픽하자고 500년된 원시림을 벌채 벌목하는데도 주저하는 바가 없다. 민원을 위해서라면 100년 숲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내는 것도 눈 깜짝할 새 해치운다.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 서낭당 나무쯤이야 택지개발로 시원하게 베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몰랐지만, 우리 옆에서 장난치고, 우리를 보호하던 요정이 떠나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창조주가 거저 준 자연을 찾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모허 절벽에는 입장료가 없다. 아일랜드 최고의 관광지에서 수익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 지하를 파서 만든 안내시설에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오래 걸렸지만 멋진 타협이 아닌가? 이것이 아니면 저것, 흑 아니면 백, 양쪽으로 나뉘어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내 말이 맞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다’는 아일랜드식 해법이 요즘 더욱 절실하다.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고통은 이해할 수 있잖아.”
 
아일랜드 골웨이의 라틴코트에서 만난 결혼식. 축하 기념 파티가 행진중이다.

아일랜드 골웨이의 라틴코트에서 만난 결혼식. 축하 기념 파티가 행진중이다.

 
국민투표로 동성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아일랜드다. ‘동성간의 결혼계약도 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에 62.1% 사람들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심지어 아일랜드는 카톨릭 국가가 아닌가 그런데 낙태시술도 불법이 아니다. 레베카와 동성혼이나 낙태시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궁금해 물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누가 내 것을 도둑질을 했다면, 나로서는 너무 화가 나지만 그건 죄라고 할 수 없다고 믿는 거야. 나는 동성 결혼이 교리에 위배되는 죄라고 생각해. 그렇다 해도 법적 권리를 박탈해서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이 너무 억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낙태도 마찬가지야.”
레베카는 기나긴 식민지 착취를 당하며 아일랜드 사람들에는 기묘한 공감능력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억울함과 고통에 유달리 민감해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고.
 
“레베카, 너희 정말 멋지다. 나의 신념에 반하는 상대의 고통이라도 감지하는 것. 네가 틀렸다 해도 너의 고통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니. 정말 근사해!”
 
세상이 내 편 아니면 악마로 나뉘는 건 아니라고 믿는 인식에 내가 거듭 감동하자 머쓱해진 레베카는 능청스레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란 없거든. 영국인들만 빼고 말이야.”
 
아일랜드가 매일 매일 더 좋아진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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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필진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 한량으로 태어나 28년을 기업인으로 지냈다. 여행가,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살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다. 길에서 직접 건져올린 이야기, 색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본 여행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정을 따라 함께 걸으며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 생생한 도보 여행의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깊이 여행하는 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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