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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스웨덴 협상서 제재 해제범위 대폭 늘렸다

중앙일보 2019.10.07 16:19
북미 실무협상의 북측 협상 대표인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7일 귀국차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에 도착해 "추후 회담 여부는 미국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북미 실무협상의 북측 협상 대표인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7일 귀국차 경유지인 중국 베이징에 도착해 "추후 회담 여부는 미국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북한이 결렬로 끝난 지난 5일(현지시간) 스톡홀름 비핵화 실무 협상에서 대북 제재 해제의 수위를 대폭 상향해 요구했다. 북측 수석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협상이 끝난 뒤 미국이 북한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위협하는 사례로 “싱가포르 조ㆍ미 수뇌회담 이후에만도 미국은 15차례에 걸쳐 제재 조치를 발동했다”고 공개 거론했다. 지난 4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제재 해제에 더는 집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제재와 관련한 공개 요구를 자제해온 북한이 6개월 만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2월 북 "안보리 제재 일부만 해제 요구"

지난 2월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때 북한은 대북 제재 5건을 해제 대상으로 지목했다. 당시에도 회담 결렬 직후 이용호 북한 외무상 등은 기자회견에서 “우리 요구는 전면적 제재 해제가 아니라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채택된 5건, 그 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고 한 것”이라고 공개했다. 

하노이선 유엔제재 5건→이번엔 미국 독자제재 15건 추가

리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3월 1일 새벽 하노이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북·미 협상 결렬이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리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3월 1일 새벽 하노이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북·미 협상 결렬이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김 대사는 이번에 미국 독자 제재 15건으로 요구 대상을 확장했다. 북한이 기존에 요구했던 유엔 제재 해제 요구를 포기했을 리는 없는 만큼 결과적으로 이번 실무협상을 계기로 북한은 유엔 제재 5건에서 ‘유엔 제재 5건+미국 독자 제재 15건’으로 해제 대상의 목표를 늘렸다.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 5건은 제재사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석탄과 광물뿐 아니라 의류와 수산물까지, 북한에 돈이 될만한 품목 거래는 모두 틀어막았다.

유엔 제재 어겨도 처벌 규정 없어

하지만 유엔 제재의 근본적 성격상 이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크다. 물론 안보리 결의는 회원국 모두가 준수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어기는 회원국을 처벌하는 기제도 유엔 규범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독자 제재는 차원이 다르다. 제재 대상으로 지정되면 미국 금융기관 및 미국인과 금융 거래를 할 수 없고 미국 내 자산은 동결된다. 달러화 거래 자체가 막힌다는 뜻이다. 이를 어겨 적발되면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분야도 사이버, 비확산, 인권, 해운 등 광범위하다.
미국 정부가 대북 독자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러시아 선박 ‘세바스토폴’호가 지난해 8월 부산항에 정박해 있다. 세바스토폴호는 북한에 정유제품을 공급한 의혹을 받고 있다. [뉴스1]

미국 정부가 대북 독자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러시아 선박 ‘세바스토폴’호가 지난해 8월 부산항에 정박해 있다. 세바스토폴호는 북한에 정유제품을 공급한 의혹을 받고 있다. [뉴스1]

미 독자제재, 세컨더리 압박도 가능

미국 독자 제재는 유엔 제재로는 불가능한 세컨더리 제재 처벌까지 담고 있다. 제3국의 단체나 개인이 제재 대상으로 지정된 북한의 단체나 개인과 거래할 경우엔 그 행위 자체가 불법이 아니더라도 거래했다는 사실만으로 미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싱가포르 회담 이후인 9월13일(현지시간) 북한의 국외 노동자 송출과 관련해 북한인 1명과 중국ㆍ러시아 기업 2곳에 대한 독자제재를 단행했다. [연합뉴스]

미국 정부는 싱가포르 회담 이후인 9월13일(현지시간) 북한의 국외 노동자 송출과 관련해 북한인 1명과 중국ㆍ러시아 기업 2곳에 대한 독자제재를 단행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미국의 독자 제재를 거론한 건 독자 제재 때문에 남북 경협이 지연되는 데 대한 불만 성격도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경의선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만 하더라도 ‘북한에서 건설ㆍ운송산업 등을 운영한다고 재무부와 국무부가 결정한 모든 인물’을 금융 제재 대상으로 간주한 미국의 행정명령 13810호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 13810호는 이를 위한 재화나 용역 제공도 금지했다.  

미 대통령 재량권 인정

다만 안보리에서 상임이사국 합의로 추가 결의 채택의 형식을 취해야 해제할 수 있는 유엔 제재와 달리 국내법과 행정명령 등을 근거로 하는 미국 독자 제재는 미국 국내절차에 의해 완화나 유예가 가능하다. 법 개정은 의회 승인이 필요하지만, 개정까지 가지 않아도 대통령의 재량권이 인정되는 내용도 상당수다. ‘미국 대통령은 ~~할 수 있다(may)’ ‘미국 대통령에게 ~~할 것을 촉구한다(urge)’ 등으로 표현되는 조항들이다. 그래서 북한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량으로 제재를 완화하는 것을 노려 독자 제재를 꺼낸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일정을 마친 뒤 워싱턴DC로 돌아와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일정을 마친 뒤 워싱턴DC로 돌아와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

다만 이에 대해 한 전직 외교관은 “대통령의 재량이 인정된다 해도 기본적으로 법 제도의 변경을 꾀하는 사안인 데다 미국에서는 대북 제재에 대한 의회의 감시권이 매우 강하다”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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