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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면 손해'라는 김지미 "요즘 할머니로서 삶 만끽하는 중"

중앙일보 2019.10.06 11:00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참석차 귀국한 김지미가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인근의 한 카페에서 한국영화 100년과 자신의 충무로 인생을 돌아보는 소회를 말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참석차 귀국한 김지미가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인근의 한 카페에서 한국영화 100년과 자신의 충무로 인생을 돌아보는 소회를 말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17살에 배우가 됐지만 뭐하는 직업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죠. 소위 트로이카(문희‧남정임‧윤정희)들이 청춘물 위주로 할 동안 전 아줌마부터 직업여성, 가사 도우미 등 (배역) 폭이 넓고 작품 수가 많았어요. 다양한 작품 덕에 생명력이 길고 현재까지 오지 않았나. 사실 저는 이쁘다는 타이틀만 갖고 여배우가 됐어요(웃음). 근데 이쁘면 손해예요. 화면에 이쁜 것만 보지 전체적으로 못 보는데, 연기를 특출나게 하려면 이뻐선 안 돼요.”

 
한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원조 팜므파탈’ 김지미(79)의 푸념 아닌 푸념에 부산 남포동 비프(Biff)광장 야외 객석에 웃음보가 터졌다. 5일 오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10월3~12일) 특별행사로 마련된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 토크에서다. 영화평론가 김형석씨 사회로 후배 여배우 전도연과 함께 무대에 오른 김지미는 자리를 꽉 메운 관객들과 눈을 맞춰가며 영화 인생을 회고했다.  

한국영화 100년의 '아이콘' 김지미 인터뷰
"영화는 사회의 거울…좀 더 다양해져야
선배 영화인들 노고를 후배들 알아주길"
부산영화제 '김지미를 아시나요' 행사도

 
토크쇼 직전 야외 스크린을 통해 그의 전성기 출연작 ‘장희빈’(1961, 감독 정창화)이 상영되자 길 가던 시민들이 “아유 곱다” “저 눈에 독기 좀 봐” 하며 흑백 영상에 빠져들었다. 60대 김씨라고 밝힌 한 여성은 “연기로나 미모로나 최고였죠. 나훈아랑 산 게 몇 번째더라”하며 김지미의 화려한 연기 인생과 결혼 이력을 입에 올렸다.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30분짜리 행사를 조금 일찍 끝낸 그와 인근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이뻐서 연기자 데뷔…배우로서 손해봐"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토크 무대에서 전도연과 함께 여배우로서의 영화 인생을 돌아보고 있는 김지미(가운데).   부산=송봉근 기자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토크 무대에서 전도연과 함께 여배우로서의 영화 인생을 돌아보고 있는 김지미(가운데). 부산=송봉근 기자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토크에 앞서 야외 스크린에 김지미의 전성시절 주요 출연작이 소개되자 시민들이 이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열린 김지미를 아시나요 오픈토크에 앞서 야외 스크린에 김지미의 전성시절 주요 출연작이 소개되자 시민들이 이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사흘 연속(6일까지) 야외 토크쇼인데, 체력은 좀 어떤지.
“미국 LA에서 한국에 지난달 26일 와서 속초 행사 갔다가 부산 와서 전야제에다 입장식에다 매일 하루 몇시간씩 다니다보니 목이…. 그래도 부르는 데 안 갈 수가 있나. 한창 활동할 때도 관객 대상 토크쇼는 했는데 야외에선 처음이라 새롭더라.”
 
부산영화제 공식 행사는 2010년 배우 회고전 이후 9년 만이다.
“사실 마음이 상해 있어서 그때 (회고전) 안 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나랑 같이 고생 많이 하며 영화제 출범에 앞장 섰던 김동호 당시 집행위원장께서 ‘영화계가 어렵다, 살리자’고 요청해서…. 이번에도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올해 한국 영화 100주년이다.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또 이렇게 왔다. 이제 후배들 도와주는 것 외에 내가 뭘 더 하겠느냐.”
 
그가 ‘마음이 상했던’ 것은 소위 ‘영화계 신구 갈등’으로 불리는 2000년대 초 ‘영진위 사태’의 앙금을 말한다. 기존의 영화진흥공사를 폐지하고 1999년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 집행부 인선 및 운영을 둘러싸고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영화인협회 측과 문성근‧명계남 등이 주축인 영화인회의(구 충무로포럼)가 세 대결을 벌였다. 갈등의 정점에서 그는 2000년 6월 협회에 사표를 내고 LA로 떠난 뒤 사실상 한국 영화계에서 손을 뗐다. 1957년 덕성여고 재학 중 ‘황혼 열차’(감독 김기영) 주연으로 혜성같이 데뷔해 배우‧제작자‧협회임원 등으로 43년간 종횡무진했던 이력에 갑작스러운 종지부였다.
 
아직도 서먹한 게 있는지.
“그럴 게 뭐 있나. 회고전 때도 최선을 다해주셨는데. 그때 일부에서 ‘왜 김지미 해주느냐’ 소리 나왔던 것도 안다. 우리가 같이 고생할 때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 부류인데…. 내가 영화계만이 아니라 정치‧재계 다방면에 아는 사람이 많고, 덕분에 성황리에 잘 됐다. 그후 매년 (다른 원로를 대상으로) 회고전이 열리는 물꼬를 튼 것 같아 다행스럽고. 와서 보면 물과 기름 같은 것도 느껴지지만, 나는 영화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다들 영화에만 전념했으면 좋겠다.”
 

2000년 '영진위 사태' 후 영화계 손떼 

전날 열린 회고전 주인공은 정일성 촬영감독(90)이었다. 20대 후반에 충무로에 입성한 정 감독은 130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촬영을 예술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추앙받는다. 김기영‧이두용‧임권택 감독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주요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700여편의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김지미와도 ‘육체의 약속’(1975) ‘비구니’(1984) 등 헤아릴 수 없는 작업을 함께 했다. 김지미는 “회고전에 생각보다 후배 감독·배우들이 많이 안 보였다”며 “대한민국 최고 촬영기사의 일종의 진갑 잔치 같은 건데 아쉽더라”고 했다. 왕년의 최고 여배우는 꼿꼿한 자세로 미소를 머금은 채 ‘뼈 아픈 소리’를 잊지 않았다.    
 

“영화계가 삭막해졌나 싶다. 옛날엔 우리가 선배들 쫓아가서 인사를 했는데. 요즘은 내가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오다가 쓱 피해가기도 하더라. 뭐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인가 싶고. 많은 영화인들이 소외당하고 있다. 선배들이 어떤 고생을 해서 오늘 영화계가 호황을 누리게 됐나, 그런 걸 뒤돌아볼 수 있어야 할 텐데….”

 
 김지미(오른쪽)가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길소뜸'(1986)의 한 장면.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왼쪽)이 주연으로 호흡을 맞췄다. [중앙포토]

김지미(오른쪽)가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길소뜸'(1986)의 한 장면.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왼쪽)이 주연으로 호흡을 맞췄다. [중앙포토]

여배우로서뿐 아니라 제작자로, 영화인협회 소속으로 전방위에서 활동했다.(※80년대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티켓’ ‘명자 아끼꼬 쏘냐’등을 출연‧제작했고 90년대 이후 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 영진위 위원 등을 역임했다)  
“하다 보니 마치 떠밀리는 것처럼 여기저기 일해야 했다. 싸울 일도 많았다. 행정부 규제에 업자들 농간에 영화법도 개정해야지, 스크린쿼터 투쟁까지. 마지막에 관두고 나니 ‘아 이렇게 편한 걸’ 싶더라. 영화 더는 안한다 했는데도 LA까지 시나리오가 왔다. 딱 끊고 나니 몸도 마음도 편하고. 그동안 못 살았던 엄마‧할머니로서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LA엔 형제들 외에 딸 둘(홍경임, 최영숙)과 손자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고 한다. 적게 먹으며 ‘1일5식’ 한다는 김지미는 “내가 입맛이 촌스러워서 한식을 즐긴다. 살림을 내가 다하니까 이탈리안‧일식까지 직접 요리한다. 있는 대로 산다. 따로 운동 안 해도 종일 움직이니까 살도 안 찐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는 좀 보시나.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기생충’(감독 봉준호)은 보셨나.
“아직 못 봤다, (LA 거주지가) 극장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서. 한국 영화 잘 만들고는 있는데, 사실 요즘 별로 안 본다. 너무 액션‧폭력‧범죄물이 많다. 나도 제작하고 외화 수입도 했지만, 영화는 사회의 거울인데 '재미'로만 될 일인가. 좀 더 다양해야지. 영화란 게 시청각 교육 역할도 하는데 예술성‧교육성을 더 고려해야지. 이게 다 투자회사가 주도해서 그렇다. 해주는 건 좋은데 간섭은 말아야지, 투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다보니 편향되는 것 같다.”
 

네번의 이혼… "더는 연애 안했다"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한 카페에서 한국 영화계에 대한 소회를 말하고 있는 김지미. 부산=송봉근 기자

5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한 카페에서 한국 영화계에 대한 소회를 말하고 있는 김지미. 부산=송봉근 기자

한국 뉴스는 계속 접하는지.
“그럼요.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집회 나뉜 것 보니 너무 슬프다. 뒤숭숭하고, 한국 오갈 때마다 ‘장사 안돼서 어렵다’ 소리 들으니. 우리가 사실 경제 성장이 놀라운 나라 아닌가. 나는 한국 오면 한번은 서해안, 한번은 동해 쪽 이런 식으로 구석구석 돌고 간다. 어찌나 발전했는지 시골도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우리 손자가 ‘할머니. 코리아 너무 깨끗해. 쓰레기 흘린 게 없어’라고 한다. 그런 얘기 들으면 흐뭇한데, 좀 잘 됐으면 좋겠다.”
 
알려진대로 김지미는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다. 홍성기(1928~2001) 감독과 배우 최무룡(1928~1999), 가수 나훈아(72)에 이어 1991년 이종구(87) 박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네번째도 11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런 화제에 거리낌이 없는 게 그의 ‘쿨한’ 면모다.  
 
여자의 연애는 언제까지인가.  
“능력 있으면 할 수 있지. 밥 얻어 먹으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내 연애? 난 이혼하고 끝이지, 더는…. 살아가는 데 결혼이 좋은 타이틀일 수도 있지만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때가 있다. 내가 이종구 박사랑 결혼할 때 남긴 말이 있다. ‘나는 아내가 필요했던 사람인데 거꾸로 남편을 얻어버렸다.’ 지금은, 아유, 너무 편해. 나는 ‘꿈을 100% 살리려면 가정에 얽매여서 이루지 못할 수 있으니 장래를 잘 선택하라’고 한다. 갈수록 사는 게 너무 힘들잖아. 요즘 젊은 세대들, 부모가 봐주지 않으면 자식 교육도 못시키니까 안 낳는 거 아니냐. 예전엔 결혼이라면 ‘이 생명 다 바쳐’ 어쩌고 했지만 요즘은 다 안 바치잖아. 각자 선택이지.”
 
1960년대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렸던 스타 김지미의 전성기 모습. [중앙포토]

1960년대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렸던 스타 김지미의 전성기 모습. [중앙포토]

인터뷰 자리에 머리가 희끗한 70대 노신사가 꽃다발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부산 출신으로 현재 거제도에 거주한다는 그는 “1968년 부산 태화극장 재개관 행사 때 받은 사인”이라며 51년 묵은 메모지를 꺼냈다. 김지미는 어느 때보다 환한 얼굴로 “여태 이걸…”이라며 다른 메모지에 변함없는 글씨체로 사인을 남겼다. “다시 뵙게 돼 너무 영광이다. 건강하시라”는 팬의 인사에 은발의 김지미도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며 화답했다. 은색 꽃무니 재킷에 큼직한 귀걸이를 하고 앙증맞은 샤넬 백을 든 전설의 여배우는 다음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산=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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