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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불멸의 정체성 집착할수록 불행에 갇혀

중앙선데이 2019.10.05 00:20 655호 26면 지면보기

김대식의 ‘미래 Big Questions’ <4> 정체성의 미래는?

카라바지오, ‘의심하는 성 토마스’(1602~1603)

카라바지오, ‘의심하는 성 토마스’(1602~1603)

손을 씻기는 한 것인가? 검지손가락을 ‘그의’ 가슴에 깊게 집어넣고 후벼 파기라도 할 모양이다. 주름진 이마를 기울여 ‘정말 피는 나는 건가?’, ‘진정으로 살과 상처는 느껴지는지’ 확인하려는 듯 말이다.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의심하는 성 토마스’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사도 성자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마치 시골 농부같이 생긴 이들에게 둘러싸인 예슈아(Yeshua). 목수로 일하던 그는 세상을 구원하러 온 신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아들이 있을 수 없는 단일 신 야웨를 섬기던 성정의 제사장들은 그를 체포한다. 자신이 못 박혀 죽을 무거운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짊어지고 걸어간 나사렛의 젊은이. 하지만 신의 아들을 사형할 수는 있는 걸까? 신의 아들이라면 자신도 신일 수밖에 없는 그가 목숨을 잃을 수 있을까?
 

예수의 부활 의심하는 성 토마스
카라바지오 그림 속 충격적 장면 …
이기적 유전자 인간은 협업도 중요
예측불능 시대 인종·종교 벗어나야

죽은 지 3일 만에 놀랍게도 부활했다는 예슈아. 하지만 모두가 그를 믿는 건 아니었다. 어딘가 수상하기도 했다. 왜 ‘부활한’ 그는 사랑하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 touch me not) 라고 말한 걸까? 무언가 숨기려는 게 아닌가? 아랍어로 “쌍둥이”, 그러니까 “타우마”라는 이름 덕분에 신약에 “디디모스”(Didymos)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성 토마스. 그는 의심이 많았다. “내 손가락으로 손바닥 못 자국을 느껴보고, 내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후벼보지 못한다면, 믿을 수 없다”라고까지 주장했으니 말이다.
  
권력이자 정치 이념이던 예수의 정체성
 
조지 그로스, ‘막스 헤르만-나이세의 초상’(1925)

조지 그로스, ‘막스 헤르만-나이세의 초상’(1925)

사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사후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고대 이집트인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우고, 죽은 자의 몸을 미이라로 보존하던 그들조차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 누구도 죽음의 세상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런데 갈릴리 출신 가난한 목수가 부활해 다시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성정 대제사장의 말대로 그는 단순한 사기꾼이지 않을까? 아니, 혹시 정말 우리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의 아들을 어리석은 인간들은 십자가에 매단 걸까? 이유 없이 태어나 일평생 고생만 하다 또다시 이유 없이 사라져야 하는 인간. 예슈아는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이유와 의미를 보여주려 했던 걸까? 사랑하기에 영원히 바라보고, 아니 적어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부모님과 연인과 아이들의 얼굴들.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운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예슈아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시뮬레이션해본 걸까? 예슈아, 그는 진정으로 누구였던가?
 
그리스도의 정체성(Christology)은 서양 종교사의 가장 큰 질문 중 하나였다. 아니, 종교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로마황제 테오도지우스(Theodosius) 덕분에 제국의 공식 종교로 승진한 기독교. 예수의 정체성은 이제 권력이자 정치적 이념이었다. 모노피지티스트(monophysitismos)들은 아버지 신과 아들 예수가 단일 존재라고 주장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대주교(Cyril of Alexandria)는 단일이지만, 존재적으로 섞여 있지는 않다는 미아피지티즘(miaphysitism)을 선호했다. 반대로 디아피지티스트(diaphysitism)들은 신과 인간의 존재는 엄격히 다르기에 예수는 신과 인간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고, 아리아니즘(Arianism)은 예수를 아버지 신의 명을 따르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신과 인간의 정체성은 엄격히 다르므로 예수는 본인의 성스러운 의지로 신의 세상과 교류했을 뿐, 그의 정체성과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몇몇 그노지스파(gnostics)는 예슈아는 어차피 인간이 아닌,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신이었기에,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흉내만 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훈족, 롱고바드족, 헤룰리족…. 아무리 죽이고 씨를 말리려 해도 로마제국을 향해 끝없이 밀려오던 야만인들. 논과 밭은 황폐화하고 수백, 수천 년 전통을 자랑하던 지중해 고대문명 도시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던 후기 로마제국. 제국의 미래를 위해 군대와 경제를 살렸어야 할 시기에 로마인들은 이념적 종교논쟁에 빠져버린다. 예수의 정체성이라는, 본인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무관한 철학적 논쟁 덕분에 황제와 황비, 장군과 군인,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죽이고 숙청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밖에 없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태산이던 그들은 왜 ‘정체성’이라는 무의미한 문제에 집착했던 걸까? 배부름을 잠재워주는 밥보다도, 갈증을 풀어주는 물보다도 인간은 가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겠지만, 영장류인 호모 사피엔스에겐 협업과 사회성 역시 중요하다. 더구나 인간은 외면과 내면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타인의 모습만으로는 그들의 생각과 정체성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타인만이 아니다. 내 머릿속 수천억 개의 신경세포들은 수천억 가지의 의견과 선호도를 가지고 있겠지만, 단 하나의 몸만을 가진 우리는 언제나 단 한 가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이고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변하는 세상 막아보려 발버둥치지만 …
 
오스트리아 ‘정체성주의자’들의 반 난민시위 모습.

오스트리아 ‘정체성주의자’들의 반 난민시위 모습.

사회가 복잡해지고 예측불가능해지는 시대. 우리는 언제나 정체성에 대한 위협과 불안을 느낀다. 한 시대의 정체성은 언제나 그 시대에 적절한 “예측 가능성”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태어난 마을에서 자라고, 일하고, 가정을 꾸린다면, 정체성 혼란이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혼란, 사회의 변화, 기술의 발전… 자연스럽고 당연하던 것들이 더는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아 보인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인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문학 평론가 막스 헤르만-나이세(Max Herrmann-Neisse)를 더는 독일 문학평론가가 아닌 독일인이 아닌, 영원히 다를 수밖에 없는 ‘유대인 헤르만-나이세’로만 인식하기 시작한다. 과거 이야기만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와 복지, 자유와 평화, 그리고 환경과 문화를 누리는 북유럽과 서유럽 시민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해서라도 무시하고 막아보려 그들은 지금 발버둥치고 있다. 선거 때마다 점점 많은 표를 얻는 반이민자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대한 소식으로 뉴스는 가득하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의 사이비 책 『위대한 인종의 죽음』에서나 등장했을 만한 인종주의적 주장들이 주류 정당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번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주는 무의미하고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불멸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한, 인류는 분쟁과 전쟁이라는 불행의 꼬리물기에서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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