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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 미국과 동맹 맺으려던 소련의 속셈과 프랑스의 선택

중앙일보 2019.10.04 16:34

Focus 인사이드

 
1945년 4월 25일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전쟁 중이던 미군 제69보병사단은 독일 동부 엘베 강에서 소련 붉은 군대 제58전위사단을 만났다. 양국 군인이 만나 악수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사진 미육군]

1945년 4월 25일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전쟁 중이던 미군 제69보병사단은 독일 동부 엘베 강에서 소련 붉은 군대 제58전위사단을 만났다. 양국 군인이 만나 악수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사진 미육군]

 

소련 막으려는 미국 'NATO' 준비
소련, "우리도 NATO 가입하겠다"
프랑스 '방위공동체' 반대표 던져
독일 패전 10년 만에 군대 창설

1945년 5월 8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항복 조인식을 끝으로 유럽에서의 제2차 대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전후 질서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었다. 패전국 독일이 이런저런 제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싫든 좋든 전쟁에 조금이라도 관여했던 나라들도 예외 없이 많은 영향을 받아야 했다. 이런 거대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승전국들이었는데, 엄밀히 말해 미국과 소련이었다.
 
얄타회담에서 한자리에 모인 세 거두 .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중앙포토]

얄타회담에서 한자리에 모인 세 거두 .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중앙포토]

 
그렇게 이 두 나라를 축으로 하는 체제 경쟁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문제는 고래 사이에 놓인 새우들이었다. 지난 제2차 대전 당시에 유럽의 약소국들은 원하지 않은 전쟁에 강제적으로 말려 들어간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위기가 고조되자 이들이 느낀 공포는 실로 대단했다. 전쟁 전에는 강국이었지만 복구에 바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도 이런 상황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맹을 맺어 안보를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 동맹은 흔하고 오래된 외교 수단이나 1939년 독일의 침략 당시에 영국, 프랑스로부터 도움을 못 받고 패망한 폴란드의 사례에서 보듯이 완벽한 보호막은 아니다. 하지만 약소국들에는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전후 등장한 최초의 다자간 군사 동맹체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 즉 NATO다. 시작은 1947년 영국과 프랑스가 맺은 됭케르크 조약이었다.
  
1949년 4월 4일, 집무실에서 관계자들의 참관 하에 미국의 NATO 가입 문서에 서명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군사 동맹체가 등장했다. [사진 wikipedia]

1949년 4월 4일, 집무실에서 관계자들의 참관 하에 미국의 NATO 가입 문서에 서명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군사 동맹체가 등장했다. [사진 wikipedia]

 
이는 1904년 영불협상 체결 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1940년까지 유지되었던 동맹을 복원한 것이었다. 여기에 1년 후 브뤼셀 조약에 따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참여하며 다자간 조약으로 확장되었다. 이때만 해도 두 번이나 아픔을 준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상황이 급변했고 1949년 미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이 회원국이 되면서 거대한 반소 동맹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서도 위기가 고조되자 서독의 재무장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소련의 침공이 있을 경우 제일 먼저 막아내야 할 서독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재무장은 필연이었지만 주변국의 거부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프랑스 수상 플레벤은 ECSC(유럽 석탄-철강 공동체) 소속 6개국으로 구성될 EDC(유럽 방위 공동체)가 통제하는 조건으로 서독군을 재창설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서독 수상 아데나워도 찬성했다.
 
NATO 가입 의사를 천명해 모두를 놀라게 만든 소련 외상 몰로토프. 서독의 재무장을 막기 위한 일종의 정치 공세였지만 의외로 NATO 내부에서는 그의 제안을 심도 있게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wikipedia]

NATO 가입 의사를 천명해 모두를 놀라게 만든 소련 외상 몰로토프. 서독의 재무장을 막기 위한 일종의 정치 공세였지만 의외로 NATO 내부에서는 그의 제안을 심도 있게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wikipedia]

 
이런 논의는 가뜩이나 NATO의 출범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소련을 자극했다. 1954년 2월 11일, 몰로토프 소련 외상은 서독의 재무장을 막기 위해 EDC 창설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대신 동서독에 주둔한 연합군과 소련군을 동시 철군시키고 가칭 유럽 안전 보장 기구를 창설하자는 제안을 했다. 한술 더 떠 4월 1일에는 미국과 영국에게 자신들의 제안을 수락하면 소련이 NATO에 가입하겠다는 파격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조약에 주적을 명기하지 않았지만, NATO가 소련에 대항하는 조직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소련이 가입하겠다고 나서자 회원국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이 서구를 분열시키기 위한 정치 공세의 목적으로 가입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기에 당연히 거부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NATO 내부에서 서독을 재무장시키지 않고 소련이 가입할 경우의 실익을 놓고 꽤 진지하게 검토를 했다는 사실이다.
 
기동 훈련 중인 창설 초기의 독일연방군. 패전 후 불과 10년 만에 독일의 재무장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때문이었다. [사진 wikipedia]

기동 훈련 중인 창설 초기의 독일연방군. 패전 후 불과 10년 만에 독일의 재무장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때문이었다. [사진 wikipedia]

 
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8월 30일, 소련만큼 독일의 재무장을 두려워한 프랑스 의회가 비준을 거부하면서 EDC 창설은 무산됐다. 소련은 목적을 달성했다고 득의만만했으나 열흘 후 개최된 NATO 회담에서 서독을 재무장시켜 나토에 편입시키자는 결의가 전격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1955년 5월 9일 서독의 NATO 가입이 이루어지고 패전한 지 10년 만인 11월 12일에 독일 연방군이 창설됐다. 당연히 소련은 격렬하게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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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이 NATO에 가입한 지 일주일도 안 된 5월 14일 동유럽 위성국 7개국을 모아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조직했고 이듬해 3월 1일에는 동독을 재무장시켰다. 소련은 승전국이지만 독일에 당한 고통이 워낙 혹독했기에 서독의 재무장을 반대했던 것이고, 내심 동독의 재무장도 꺼렸었다.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독일 재무장은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경쟁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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