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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통화 경제' 위기?…한국 경제에 짙어지는 디플레이션과 유동성 함정의 그림자

중앙일보 2019.10.03 19:03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중앙은행이 원하면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이제는 어려워졌다. ‘블랙홀 통화경제학’이라 부르든, ‘일본화(Japanification)’라 부르던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중앙은행은 이런 현상을 우려해야 한다.”
  

[하현옥의 금융산책]
저성장ㆍ저금리ㆍ저물가 ‘위기3저’
금리 내려도 경기 안 살아나고
좀비기업 늘고 버블 역효과만
서머스 “재정 정책 초점 맞춰야”

 2013년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에 직면했다고 주장했던 래리 서머스 미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트위터에서 ‘유동성 함정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미 재무장관과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그는 올 초 “세계적 차원의 경기 침체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머스가 말한 ‘블랙홀 통화 경제학’은 금리가 제로 수준에 머무르며 출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는 “일본과 유럽에서 한 세대 이상 채권 수익률이 제로 또는 마이너스 수준에서 머물 것이란 전망이 확고한 인식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블랙홀 통화 경제’위기 직면한 한국 경제.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블랙홀 통화 경제’위기 직면한 한국 경제.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런 상황에서 경기를 살리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며 돈줄을 풀어도 돈은 돌지 않는다. 불확실한 경기 전망에 가계는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꺼린 채 돈을 쌓아두기 때문이다. 경제의 활력은 떨어지고 성장도 둔화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경기 둔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격적인 통화 정책을 펼쳤지만 국채 금리는 더욱 하락하는 악순환으로 저성장·저금리·저물가에 빠진 일본이 대표적인 예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켜지는 한국 경제의 상황이 딱 이렇다. 올 1분기 한국 경제는 역성장(-0.4%)했다. 기저효과 등으로 2분기 성장률은 1%를 기록했지만 저성장이란 꼬리표를 떼기는 어렵다.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무는 금리는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 기준금리를 연 1.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연내 추가 인하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지난 9월 -0.4%를 기록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동기대비)은 두 달 연속 마이너스에 머물고 있다.  
이어지는 저금리 기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어지는 저금리 기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서머스는 ‘블랙홀 통화 경제’에 빠지면 통화 공급의 수도꼭지를 여는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돈값(금리)이 싸지면서 가계와 기업의 빚이 늘고 자산 가격 상승을 부추겨 버블(거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싼값에 빌릴 수 있게 돼 부채 부담이 줄어들며 (구조조정 등이 미뤄져) 부실기업의 좀비화를 가속화해 경제의 활력도 떨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한 해법으로 서머스가 강조하는 것이 확장적인 재정정책이다. 통화정책 약효가 떨어지는 유동성 함정에 가까운 경제에선 경기 둔화와 디플레이션을 막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크지만 무딘 칼’로 여겨지는 금리 정책은 가계와 기업 등 광범위한 경제 주체에 무차별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책 효과가 나타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면 재정정책은 상대적으로 빨리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목표를 겨냥한 정밀 타격도 유도할 수 있다.  
  
물가 상승률은 마이너스로.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물가 상승률은 마이너스로.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7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경기부양) 효과가 빠른 데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개혁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과 같은 저금리ㆍ저물가 상황에선 정부가 수요를 창출하는 재정지출에 기댈 수밖에 없다. 케인시안이 다시 부활하는 셈”이라며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에서 금리 인하로 물가를 조절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물론 무작정 재정을 쏟아붓는 게 해법은 아니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재정을 잘못 쓰면 오히려 시장 왜곡이 생길 수도 있다”며 “이번 정부에서 재정 지출을 늘려왔지만 오히려 경제성장률은 떨어진 것을 감안할 때 일회성 효과를 노린 복지성 지출보다는 연구개발(R&D)나 사회 인프라 건설 등 경제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건설적인 쪽으로 재정 집행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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