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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앞두고 한국 찾은 세계적 연출 거장 유제니오 바르바 "우리 연극은 인생 그 자체"

중앙선데이 2019.10.02 16:27
 
‘연극 인류학의 창시자’이자 ‘세계 3대 연출가’로 꼽히는 거장 유제니오 바르바(Eugenio Barba)가 이끄는 덴마크 오딘(Odin) 극단이 한국을 찾았다. 올해 19회를 맞는 2019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일환으로 10월 3일부터 5일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크로닉 라이프:만성적 인생’이다.  

'크로닉 라이프: 만성적 인생' 10월 3~5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
제19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여하고 내년 광주아시아문화전당 공연 워크샵 개최

연출가 유제니오 바르바 [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연출가 유제니오 바르바 [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국립연극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창단된 아웃사이더들의 모임인 오딘 극단은 1966년 덴마크 홀스테브로로 근거지를 옮겼고, 인구 2만명의 소도시에서 장장 56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이상적인 연극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4개 대륙 11개 국가에서 모인 40여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오딘 극단은 50여년 동안 대표인 유제니오 바르바부터 말단 스태프까지 모두 평등하게 한화 50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아 온 것으로 유명하다. 1년 예산 40억원 중 50%는 홀스테브로시나 유럽연합의 펀딩을 받고, 50%는 세계를 돌며 공연과 강연으로 직접 수입을 올리고 있다. 
  
유제니오 바르바와 오딘극단 주요배우들, 경희대 이동일 교수(오른쪽)[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유제니오 바르바와 오딘극단 주요배우들, 경희대 이동일 교수(오른쪽)[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오딘 극단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 위에서도 각자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자막은 일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로닉 라이프’도 마찬가지다. 2031년,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하나는 체첸 난민인 한 미망인 이야기다. 폐허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을 품고 있다. 또 하나는 콜럼비아에서 온 소년의 이야기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를 찾고 싶어 무조건 건너 왔다. 두 가지 이야기가 마치 피카소의 큐비즘 회화처럼 한 무대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관객은 어느 하나의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2일 만난 유제니오 바르바는 “지금 유럽에서 현재 벌어지는 난민 문제로 브렉시트처럼 국민이 분열되어 첨예하게 다투고 있는 상황이 마치 전쟁과 같다”며 “우리 공연은 전쟁이 끝난 뒤에 시작된다. 아무 준비없이 일상이 파괴된 채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 한과 잘못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 생각한다”고 했다.
 
연극 '크로닉 라이프' [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연극 '크로닉 라이프' [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일반 연극처럼 액자 속을 들여다보는 구조가 아니라 무대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관객이 선택해서 보게 되기에, 관객은 각자의 몽타주를 가지게 된다. 관객 한 사람의 개인적 역사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고, 선택한 시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기에 모든 관객은 각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오딘 극단의 주요 배우인 로베르타 카레리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같은 그림도 있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동시에 여러 측면을 보게 하는 예술도 있다. ‘지금 이순간’이 연극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단 걸 인식하자. 우리는 뭔가를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라고 했다.   
 
또다른 배우 줄리아 발리는 “젊은 친구들은 재밌고 행복한 공연이라 생각하고 기쁜 에너지로 나가는 걸 봤는데, 나이 든 관객은 굉장히 비극적인 공연이라 생각하기도 하더라. 한국 초연인 만큼 한국 관객이 어떤 반응 보일지가 초미의 관심사”라고 기대감을 전했다.  
 
결코 쉬운 공연은 아니다. 상하이 공연에서는 ‘자막이 없어 이해를 못했다’며 환불을 요구한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배우들은 “칸딘스키 작품을 이해 못 한다고 환불해달라고 하지 않듯 우리 연극은 음악으로, 이미지로 즐겨달라”고 입을 모았다. 이성적으로 스토리를 이해하려는 태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인생 자체가 유기적으로 빨려들어가 통찰력으로 이해하는 공연이란 것이다.  
 
연극 '크로닉 라이프' [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연극 '크로닉 라이프' [사진 국제공연 예술제]

본고장 덴마크인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연도 아니다. 유제니오 바르바는 오딘 극단의 가장 중요한 차별성이 각자 언어가 다른 다국적 배우들의 모임에서 공용어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덴마크어로 공연해도 못 알아듣겠다고 한다”면서 “관객에게 언어가 아니라 어떻게 대사를 뛰어넘는 연극적 언어로 이해시키냐가 관건이다. ‘벙어리 배우’들의 표현처럼 노래도 특이한 방법으로 부른다. 56년 전에는 우리가 색다른 언어로 연극을 만드니 사람들이 우리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지만, 이제 우리가 도시 전체의 영감의 원천이 됐다. 우리가 재능이 많고 위대한 예술가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벙어린데 뭔가 얘기하고 싶은 벙어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0년 은퇴를 앞둔 유제니오 바르바의 후계자는 특이하게도 한국에서 온 입양아 페르 캅 예손이다. 그는 “오딘의 연극은 기계적으로 부품처럼 살고 있는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라며 “56년 동안 이뤄낸 업적들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채널 바꾸듯 정체성을 바꾸기 쉬운 세상에서 오랜시간 동안 헌신해 만들어낸 예술품에 경의를 표한다. 물질만능 사회에서 내가 이어가려는 것도 이런 가치”라고 포부를 밝혔다.
 
유제니오 바르바와 오딘극단은 전세계를 돌며 각국의 인간문화재 등 예술인들과 협업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내년 10월 광주 아시아문화의 전당에서 광주항쟁과 아시아 민주화 과정에 관한 공연을 한국 예술가들과 함께 올린다. 이를 위해 6일부터 10일까지 광주에서 무용가 김매자 등과 워크숍을 갖는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경희대 이동일 교수는 “오딘 극단의 작업은 문화를 서로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는 놀라운 테크닉을 ‘바터’라고 부른다”면서 “덴마크 홀스테브로에서 아프리카 케냐 무용단을 불러 문화를 나눴듯, 광주에서도 시장에서 짜장면 만드는 사람들을 불러 서로의 문화를 나눌 것이다. 이런 진정성이 우리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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