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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외환위기 때와 닮은 점, 더 나쁜 점

중앙일보 2019.10.01 00:28 종합 27면 지면보기
이상렬 경제 에디터

이상렬 경제 에디터

많은 사람이 경제가 위기라고 얘기한다. ‘조국 사태’에 열을 올리다가도 경제로 화제가 넘어가면 금방 한숨이 이어진다. 지금의 경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지표는 한두개가 아니다. 경제의 총체적 성적표인 성장률은 2% 달성이 힘들어 보인다. 외환위기(1998년, -5.5%)나 글로벌 금융위기(2009년, 0.7%) 같은 위기 상황 말고 이런 저성장은 없었다. 경제가 제대로 성장을 못 하고, 정부가 돈을 나눠 줘가며 만드는 임시 일자리 외엔 일자리가 충분히 생겨나지 않고 있고, 돈이 돌지 않아 급기야 물가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이 상황이 위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위기인가. 외환위기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면, 지금은 속으로 골병이 들고 있는 셈이다.
 

일본형 불황 조짐 뚜렷한데
위기감 부재, 포퓰리즘 만연
한국의 투자매력부터 높여야

우리 경제에 나라의 외환금고가 바닥나는 식의 외환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정부가 입만 열면 자랑하는 대로 외환보유액은 4000억 달러가 넘었다. 국제금융시장이 결딴 나는 상황이 아니라면 국가부도를 염려할 정도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정작 걱정되는 점은 2019년의 한국 사회가 1997년의 외환위기 당시와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집권세력 내부의 위기의식 부재다. “우리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이 이를 대변한다. 위기가 오는데도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면 경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97년 당시 한국 사회는 “한국 경제는 펀더멘탈이 튼튼하다”는 ‘펀더멘탈론’에 취해있었다. 그런 비이성적 낙관론 속에 개혁과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쳤다. 그해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진로, 기아 등 대기업 부도가 터져 나왔지만 부실기업 수술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해외자본의 이탈과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20여년 전과 닮은 점은 또 있다. 정치권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만연과 노조 세력의 득세다. 집권 2년간 모른 척했던 대기업 단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아간 자리에서 “문재인 정부가 대기업 노조 편, 민주노총 편이 아니다”고 했던 여당의원은 노동계가 반발하자 하루 만에 사과한다고 했다. 기업의 사기를 높여서 경제를 살리는 것보다 노동계에 찍히지 않는 것이 먼저라는 식이다.
 
서소문 포럼 10/1

서소문 포럼 10/1

표에 현혹된 정치권은 나라 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다. 기업들이 목을 매는 주 52시간제의 탄력근로 확대나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안은 아직 처리되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그랬다. IMF라는 저승사자가 문 앞에 와있는데도 금융개혁 입법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법안은 다 마련돼있었지만, 여야 할 것 없이 대선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법안 처리를 기피했다.
 
외환위기 때보다 못한 것도 많다. 우선 대외 여건이 훨씬 나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글로벌 분업체계를 뒤흔들어 세계경제를 수렁으로 밀어넣고 있다. 덩달아 세계 각국이 무역 장벽을 쌓아 올리면서 보호무역 기조는 대공황 이후 최악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경제로선 치명적인 상황이다. 수출이 10개월 연속 감소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수 있다.
 
지금도 상대적으로 재정이 건실한 편이지만, 20여년 전엔 훨씬 더 튼튼했다. 그 뒤엔 ‘노(No)’라고 말할 줄 아는 관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IMF 협상단이 “적자재정을 편성하라”고 밀어붙이는 데도 “건전재정이 중요하다”며 눈에 불을 켜고 버텼다. 재정 확대에 소극적이었던 바람에 경기가 더 얼어붙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재정 건전성 사수 의지만은 높이 살 만했다.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맞서야 할 관료들의 결기는 예전 같지 않다. 나랏빚이 급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선배 예산 관료들은 뭐라고 할까. 한번 무너진 재정의 둑은 다시 세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불길한 것은 외환위기 시절보다 더 지독한 불안감과 비관론이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는 심리인데, 그 심리가 무너지고 있다. 해외로 나가는 직접투자액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국내 설비투자는 10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성장 동력이 얼어붙으면서 일본식 장기 불황이 이미 시작됐다고 보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경제가 위기라는 데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 정부 역시 경제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과 사람과 돈이 떠나는 경제를 무슨 수로 살리겠다는 것인가. 경제 살리기는 한국 경제의 투자 매력이 왜 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상렬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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