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운동하는 청춘의 슬픔 "노력대로 안 되는 세상 몸은 정직하죠"

중앙일보 2019.09.29 08:00
영화 '아워 바디' 한 장면. 배우 최희서(사진)가 8년을 준비한 공무원시험을 포기하고 달리기를 시작한 서른한 살 자영 역을 맡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아워 바디' 한 장면. 배우 최희서(사진)가 8년을 준비한 공무원시험을 포기하고 달리기를 시작한 서른한 살 자영 역을 맡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되는 것 없던 청년 백수가 달리기를 통해 다시 ‘살아있음’에 눈뜬다. 26일 개봉한 ‘아워 바디’(감독 한가람)은 이런 현실적인 주제로 지난해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돼 주목받은 영화다.  
“나 시험 보러 안 갔어. 엄마, 내 나이엔 취직도 못 해.” 8년 차 행정고시생인 주인공 자영(최희서)의 자포자기한 폭탄선언. 명문대 나와 공무원준비에만 매달리다 이룬 것 없이 서른한 살이 됐다. 감정이 다 메마른 채 찌들어 있는 그는 오랜 남자친구와도 영혼 없이 이별한다. 공부도, 삶에도 다 지쳐있던 그는, 매일같이 동네를 달리는 동갑내기 현주(안지혜)를 만나 달리기에 빠져든다.  

26일 개봉 영화 '아워바디' 한가람 감독
달리기에 빠진 8년차 고시생 애환 다뤄
'동주' '박열' 배우 최희서 첫 단독 주연
"타인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 말하고파"

영화 ‘박열’ ‘동주’로 주목받은 배우 최희서가 고시생의 망가진 심신부터 달리기로 단련된 후까지를 섬세하게 그려 부산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차지했다.  
 

운동 중독자의 슬픔

그러나 방황하던 청춘이 운동으로 새 삶을 찾는 마냥 희망찬 결말을 떠올리면 오산이다. 영화의 본론은 정작 ‘그 다음’에 있다. 원하던 몸을 얻은 자영에겐 예기치 못한 공허감이 찾아든다.  
영화 '아워 바디'로 장편 데뷔한 한가람 감독. 2년 전 단편 '장례난민'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 없어 차에 관을 싣고 길 위를 전전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 주목받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아워 바디'로 장편 데뷔한 한가람 감독. 2년 전 단편 '장례난민'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 없어 차에 관을 싣고 길 위를 전전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 주목받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한가람(34) 감독이 20대 후반부터 달리기를 해온 경험담이 토대다. 개봉 전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나와 내 주변에서 보고 겪은 일을 일기처럼 정리한 영화”라며 “내가 달리기 시작한 건 방송국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자존감이 낮았던 시절이다. 운동화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고, 뛰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운동하며 느낀 감정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고 돌이켰다.  

“‘나도 입사시험 합격했다, 정규직이 됐다’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잖아요. 30분 정도 쉬지 않고 뛰면 현실에선 갖기 힘든 성취감이 느껴져 기분 좋았어요. 막상 돌아서면 현실은 나아진 것 없이 고통스러웠죠.”

그는 “주변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운동하며, 운동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 맹신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면서 “왜 저렇게까지 운동할까. 솔직하게 질문을 던지고픈 마음에서 이 영화를 출발했다”고 말했다.
'아워 바디'에서 자영을 달리기로 이끄는 현주 역은 배우 안지혜가 맡았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무사 비월 역으로 액션연기를 선보인 그는 한국체육대학교 출신으로 어릴 적 기계체조를 했다. "실제 운동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중요했다는 한가람 감독은 마라톤대회 홍보사진 속 그의 모습을 보고 캐스팅을 결정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아워 바디'에서 자영을 달리기로 이끄는 현주 역은 배우 안지혜가 맡았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무사 비월 역으로 액션연기를 선보인 그는 한국체육대학교 출신으로 어릴 적 기계체조를 했다. "실제 운동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중요했다는 한가람 감독은 마라톤대회 홍보사진 속 그의 모습을 보고 캐스팅을 결정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시나리오 때부터 ‘아워 바디’란 제목을 붙였다고.
“게임 속 캐릭터 바디(body‧몸)를 만들 듯 몸은 노력하면 바꿀 수 있잖나. 남들한테 인정받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드는 느낌도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 자영이 주변 사람들을 보며 깨닫는 우리 모두의 몸이란 의미도 담고 싶었다.”  
 
운동에 매달리는 심리를 청년세대 현실에 엮어냈는데.
“나나 내 친구들 심정을 많이 갖고 왔다. 노력한 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대학이든, 직장이든 뭔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 20~30대는 내 의지로 뭔가 해내고 있다는 것을 지속해서 보여줄 수단이 ‘몸’이란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체도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연애도, 결혼도, 여유 없다

왼쪽부터 자영(최희서)과 현주(안지혜). 달리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각자 남모를 어둠을 안고 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왼쪽부터 자영(최희서)과 현주(안지혜). 달리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각자 남모를 어둠을 안고 있다. [사진 영화사 진진]

건강한 몸을 얻은 뒤 자영의 일탈적인 성행위는 다소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섹스는 몸을 쓴다는 점에서 운동과 같은 맥락이다. 상대방과 관계를 통해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기도 하다. 후반부 자영이 (뜻밖의 상대와) 하는 섹스를 불편하게 보는 분도 많던데, 나로선 그가 그 직전의 어떤 상실로 인해 겪는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보여주고자 했다. (고시생 시절인) 첫 장면에서 ‘남친’과는 하기 싫은 것을 하는 듯했던 섹스와 달리 그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행동이란 대비도 주고 싶었다.”
  
영화엔 서로 진심으로 통하는 관계가 그려지지 않는다. 한 감독은 “의식하진 못했지만, 나부터 여유가 없었다”면서 “흔히 말하는 일반화지만 연애도, 결혼도, 할 여유가 없는 요즘 젊은 세대 처지를 자연히 반영했던 것 같다”고 했다.  
 

최희서 연기에 울컥한 장면

이번 영화로 첫 스크린 단독 주연에 나선 최희서. 뚝심 있게 극을 이끈 연기로 호평 받은 그는 개봉 이틀 뒤인 28일 웨딩마치를 올리며 겹경사를 맞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이번 영화로 첫 스크린 단독 주연에 나선 최희서. 뚝심 있게 극을 이끈 연기로 호평 받은 그는 개봉 이틀 뒤인 28일 웨딩마치를 올리며 겹경사를 맞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가족도 서로 온전히 기대지 못한다. 한 감독이 촬영하며 가장 울컥한 순간은 아버지가 없는 자영이 결말 부 직전 엄마(김정영), 동생 화영(이재인)과 셋이 외식하는 장면. 자영은 자신이 행시를 포기한 것도, 달리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던 엄마에게 이때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는다. “엄마는 쉬지 않고 얼마나 오래 달려봤어? (나는) 처음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가 이것만 하면 세상에 못할 게 없을 것 같더라고.” 한 감독은 “실제 저희 엄마하고 하고 싶었는데 차마 못 했던 말”이라 했다.
그는 또 “시나리오에선 담담한 장면이었는데 최희서 배우의 연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면서 “최희서씨는 미세한 감정표현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것이 좋았다”고 돌이켰다. “한 달여 촬영 기간 동안 자영의 변화를 드러내기 위해 훈련으로 몸이 제일 좋은 상태를 찍은 뒤에 나쁜 상태는 옷이나 자세로 속여 나머지 장면을 순서대로 찍었어요. 식이요법까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추진력 강하고 끈기 있게 자기 페이스를 지켜줘서 현장에서 많이 의지했죠.”  
달리는 기쁨도 잠시, 자영은 취직이란 현실의 문제에 부닥친다. [사진 영화사 진진]

달리는 기쁨도 잠시, 자영은 취직이란 현실의 문제에 부닥친다. [사진 영화사 진진]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이는 그가 이번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김애란 단편소설 ‘서른’ 한 대목이다. 한 감독은 “서른 살 즈음에 읽고 울컥했다”면서 “소설 속 주인공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들을 하나도 못하고 서른이 된 상태다. 나만 이런 생각한 게 아니구나, 하며 ‘아워 바디’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를 본 분들이 이런 삶도 있구나, 하며 힘을 얻기를 바랐다”고 했다.  
 

사람 사이 섬세함 그리고파 

한가람 감독의 2017년 단편 '장례난민'. 당시 주연을 맡은 이재인(왼쪽)은 이번 '아워 바디'에도 자영의 동생 화영 역으로 출연했다. [사진 미쟝센단편영화제]

한가람 감독의 2017년 단편 '장례난민'. 당시 주연을 맡은 이재인(왼쪽)은 이번 '아워 바디'에도 자영의 동생 화영 역으로 출연했다. [사진 미쟝센단편영화제]

2년 전 단편 ‘장례난민’에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곳이 없어 아버지와 차에 관을 싣고 길을 전전하는 어린 두 딸의 몽환적인 하루를 그려 미장센단편영화제 비정성시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던 그다. ‘아워 바디’는 “첫 장편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단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면 내가 지나온 감정들도 정리가 되고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다시 만든다면 완전히 새로운 영화가 될 것 같아요.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사람 사이의 섬세함을 그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