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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사건에도 법최면 수사관…2003년 서초 살인범 잡았다

중앙일보 2019.09.29 07:00
1978년 9월 부산광역시에서 9살 된 여자아이가 유괴됐다. 범인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거액을 요구했다. 경찰은 유괴범의 차량 번호를 알기 위해 현장을 목격한 아이에게 최면을 걸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최면수사가 도입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이 유괴사건을 다룬 영화 '극비수사'에도 묘사됐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이모(56)씨 수사에 법 최면 전문가가 투입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면수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면수사는 목격자나 피해자의 희미한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기법이다. 강력 사건이나 교통사고 등의 피해자나 목격자는 당시의 충격과 시간 경과 등에 따라 사건에 대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이럴 경우 최면을 걸어 기억력을 되살린다.
 
최면 상태에서 문답하는 장면. [일간스포츠]

최면 상태에서 문답하는 장면. [일간스포츠]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기억 끄집어내"

최면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자와의 수사관 간의 신뢰와 공감대다. 수사관은 최면수사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등을 확인하는 면담을 통해 대상자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기분 좋은 이야기 등을 하며 대상자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킨다. 대상자가 최면에 걸렸다고 느껴지면 눈을 감게 하고 "피곤해진다", "눈이 무거워진다" 등 대화를 걸며 오감(시간,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깨운다. 오감이 활성화돼야 집중도가 높아져서 당시 상황을 기억해내는 작업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지각능력이 없는 사람은 최면수사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어느 정도 오감이 활성화되면 수사관은 대상자에게 사건을 회상토록 한다. “앞에 보이는 사람이 누군가요” 등의 질문을 던지며 사건 현장을 재현한다. 정보를 얻으면 다시 최면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도록 유도한다. 


7년간 법 최면 수사를 해온 한 경찰 수사관은 “최면을 통해 당시 상황으로 가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며 “용의자의 인상착의, 뺑소니 차량 번호 등을 기억하거나 강력범죄의 경우 이 진술을 바탕으로 수배 전단에 들어갈 몽타주를 작성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최면수사가 본격화된 것은 1999년부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범죄심리과에 최면수사 전담부서가 설치됐다. 경찰도 2009년 경찰수사연수원에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에서 21명의 법 최면 전문가가 활동하고 있다.
최면수사는 다양한 범죄수사에 쓰인다. 뺑소니 등 교통사고부터 성폭력·강도 같은 강력사건에도 투입된다. 폐쇄회로 TV(CCTV) 등 물리적인 증거가 마땅치 않을 때,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을 되살려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에 오래된 사건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뺑소니부터 강력·미제사건도 해결

지난해 부산에선 A씨(42)가 30년 만에 헤어진 아버지(67)를 찾았다. A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어린 시절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했다. 성인인 된 후 가족을 찾아 나섰지만, 보육원에 들어가면서 호적이 바뀐 탓에 헤어진 가족을 찾을 단서가 없었다. 부산경찰청은 최면수사를 통해 A씨의 어린 시절 기억들을 분석해 아버지의 이름과 비슷한 연령대 남성을 추렸다. A씨는 결국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미제 사건도 해결했다. 2003년 서울 서초구의 한 가정집에 강도가 들어 금품이 없어지고 30대 여성이 살해됐다. B씨가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증거가 없었다. 이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2016년 이 사건을 재수사하던 경찰은 B씨의 전처를 상대로 최면수사를 벌여 “B씨가 사건 발생 무렵 이상 행동을 보이고 많은 돈도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B씨를 추궁하자 B씨도 범행을 실토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도 최근 법 최면 전문가 2명을 투입했다. 사건이 33년 전 발생한 만큼 목격자들의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모방범죄로 밝혀져 범인까지 검거된 8차 사건을 제외한 모두 9차례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목격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사건이 33년 전에 발생한 만큼 목격자들의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경찰은 먼저 7차 사건 당시 버스안내양과 9차 사건 목격자인 남성을 상대로 최면 수사를 벌였다. 과거 용의자의 수배 전단 작성에 도움을 줬던 버스안내양의 경우 당시 증언과 비슷한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70cm 정도의 키에 갸름한 얼굴의 20대 남성이 사건 현장 근처에서 버스에 탔는데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옷이 젖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9차 사건 목격자였던 남성에게선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은 2~3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사이에 발생한 성폭력·강도 미수 사건의 피해자도 불러 최면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성이 본 피해 수법도 살인 사건과 비슷하다.
 

화성 용의자 추가 목격자 수소문

경찰은 다른 추가 목격자들의 존재와 소재도 파악하고 있다. 과거 언론 기사 등을 보면 4차 사건과 9차 사건 등에서 용의자를 목격한 이들을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바로 직전에 발생했던 7건의 연쇄 강간사건과 미수사건, 6차 사건과 7차 사건 이후 수원에서 여고생 2명이 숨진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 등도 이 씨와 관련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이씨가 처제를 살해했던 1994년 이전에 충북 청주 일대에서 벌어진 미제 사건도 확인 대상에 올랐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범행을 부인하고 있는 만큼 목격자 최면조사에서 이씨의 범행을 입증할 의미 있는 진술을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모란·심석용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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