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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라짜로    [기타]

행복한 라짜로 [기타]

성경 속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되살아난 인물이다. 그를 죽음에서 걸어 나오게 한 것은 예수의 음성이었다. 기적이 일어났지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공포만 커졌다. 아무도 현현한 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신화적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여기에 1980년 이탈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집단농장 노예사건’을 접합했다. 올해 38살의 이탈리아 여성 감독 로르와커는 이 영화로 ‘제71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는다.

<행복한 라짜로>는 전반과 후반으로 명확히 나뉜다. 주인공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부활을 기점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점프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독특한 건 관객들로 하여금 시공간이 뒤틀린 듯 기이한 시간여행을 체험하게 한다는 점이다. 흔하디흔한 플래시백이나 점프컷 없이 느린 화면만으로 얻어낸 성취다.


이런 사람에게 추천
몽환적인 우화를 찾는다면
볼거리보다 여운이 중요하다면
라짜로 얼굴(?)에 끌렸다면


이런 사람에겐 비추천
‘행복한’에 방점을 찍은 분이라면
개연성을 중시한다면
느린 영화가 싫다면

두 개의 실종, 두 개의 붕괴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작품의 무대가 되는 ‘인비올라타’는 담배 생산을 주업으로 삼는 소작농 마을이다. 목가적인 풍경과는 달리 이 마을은 후작부인 알폰시나(니콜레타 브라스키)의 허락 없인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억압적인 착취의 공간이다. 

여기서도 라짜로는 말단이다. 마을 주민 누구나 부려먹는다. 죄책감도 없다. 알폰시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안토니오(알바 로르와처)를 제외하면 그에게서 최소한의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 더 기가 차는 건 라짜로 본인이다. 단순히 순박하고 착하다는 정도로는 설명이 힘들다. 라짜로는 시키는 모든 일을 부지런히 해낸다. 거절이나 반항 같은 건 없다. 답답한 존재다.

악랄한 알포시나 조차 “저 애(라짜로)를 봐, 난 농부를 착취하고 그들은 저 애를 착취하지”라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짜로는 거울 같기도 하다. 타인의 욕망을 수렴함으로써 세계의 모순을 투영하는 존재.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전반과 후반의 경계엔 두 개의 실종이 교차한다. 하나는 필연이고, 하나는 우연이다. 라짜로의 친구이자 알폰시나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는 엄마의 관심을 받고자 납치 자작극을 벌이고 산속에 숨는다. 한편 그를 돕는 라짜로의 그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산으로 가던 중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두 개의 사건은 개별적이지만 서로의 세계를 전복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전자의 실종이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재촉한다면 후자의 실종은 라짜로의 탈인간을 촉발한다.

이토록 시린 세계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자작극으로 의도치 않은 공권력이 개입하면서 집단농장의 실태가 탄로난다. 인비올라타의 소작농들은 자유를 얻고 도시로 이주한다. 남루한 현실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미와 형태만 다를 뿐이지 노예나 착취는 여기에도 존재했다.

라짜로의 부활은 영화에서 매우 신성하게 다뤄진다. 전설 속에서 불려나온 늑대의 속삭임에 라짜로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십수 년이 흘렀지만 얼굴뿐 아니라 옷차림까지 그대로다. 이때 카메라는 절벽을 오르는 라짜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아낸다. 명백한 신의 시점이다. 그가 어떤 존재로부터 보호받는지, 어떤 존재로 보여주는 시점쇼트다.

폐허가 된 인비올라타를 떠나 라짜로가 향하는 곳은 도시다. 탄크레디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다. 여기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시리도록 슬픈 도시의 풍경이다. 이 세계에 낙관 따윈 사치라고 말하는 듯하다. 라짜로의 눈에, 전근대와 근대의 본질적 차이는 없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여기서 재밌는 건 어른이 된 안토니오다. 그녀는 도시에 도착한 라짜로를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이다. 그는 세월을 비껴간 라짜로를 보며 무릎을 꿇고 경외를 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루한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라짜로는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슈퍼맨 같은 능력은 없다. 내세울 거라고는 착함뿐, 무기력하다.

모든 현실은 라짜로에게 절망으로 와 닿는다. 그리고 탄크레디와의 재회로 절정을 맞는다. 더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은행 빚에 허덕이고, 가난에 찌든 술주정뱅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라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IMDb]

낭만이라고는 1도 없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마술적인 순간은 끝에 찾아온다. 성당 장면이다.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들어온 라짜로 일행에게 수녀는 매몰차게 대한다. “잠깐 음악만 듣겠다”는 간청에도 “비공개 의례”라며 내쫓는다. 라짜로 일행이 성당을 떠나자 이내 음악이 멈춘다. 연주자는 건반을 눌러보지만 소리는 나지 않는다.

이때 라짜로 일행을 쫓아낸 수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이 떠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열린 창을 비춘다. 수녀는 “창을 닫으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음악은 어디로 떠났는가. 고물 트럭을 힘겹게 미는 라짜로 일행을 쫓아간다. 가족 누군가 “음악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고 외치자 동작을 멈추고 부유하는 음악을 바라본다. 

음악과 대사로 이뤄진 장면에 불과하지만 이로부터 파생하는 감정적인 스펙터클은 여느 블록버스터 못지않다. 기묘한 전율과 쾌감을 주기도 한다. 카메라는 일행들의 얼굴을 세심하게 잡아내며 환희의 순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라짜로의 표정은 어딘가 어둡다. 그리고 일행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진다. 퇴장한 자리를 응시하는 라짜로의 볼에 눈물이 타고 흐른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슈아픽처스]

영화 <행복한 라짜로> [사진 슈아픽처스]

마지막 씬에 이르러 라짜로는 소멸한다. 그곳이 ‘은행’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강도로 오인돼 뭇매를 맞는 순간, 인비올라타의 늑대가 등장한다. 피를 흘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늑대는 무심하게 지나친다. 그리곤 늑대는 도시를 뒤로 한 채 어디론가 달려간다.

<행복한 라짜로>에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가난을 묘사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 영화가 시린 데는 신의 존재를 두고도 ‘알아채지 못함’, ‘어쩔 수 없음’이라는 무기력에서 기인한다. “성자(聖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말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늑대가 향한 길의 끝에, 인간이 있긴 할까. 또 음악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글 by 정나미. 기자, 영화보며 그루밍 


제목  행복한 라짜로(2018)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
출연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루카 치코바니 외
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IMDb 7.6 로튼토마토 90% 에디터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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