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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셔틀’로 사귄 아래층 아줌마

중앙선데이 2019.09.28 00:20 654호 18면 지면보기

안충기의 삽질일기

코스모스는 대개 가을꽃이라고 생각하지만 6월부터 핀다. 아주 몹쓸 땅이 아니면 어디서든 뿌리를 내린다. 1930년대만 해도 분포기록이 없다고 하니 광복 이후에 이 땅에 들어왔을 거라 추정한다. 백일홍·나팔꽃·강아지풀·개망초 ... 농장 들어가는 길은 지금 가을 꽃 천지다.

코스모스는 대개 가을꽃이라고 생각하지만 6월부터 핀다. 아주 몹쓸 땅이 아니면 어디서든 뿌리를 내린다. 1930년대만 해도 분포기록이 없다고 하니 광복 이후에 이 땅에 들어왔을 거라 추정한다. 백일홍·나팔꽃·강아지풀·개망초 ... 농장 들어가는 길은 지금 가을 꽃 천지다.

이삿날 오후였다. 겨울 끝자락이라 바람이 제법 매웠다. 에어컨 설치기사 둘이 베란다 밖에 실외기를 다는데 아래층 아줌마가 뛰어 올라왔다. 연배가 중년과 노년 사이로 보였다. 왜 시끄럽게 거기다 못질을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밖에 달면 소음과 진동이 밑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베란다 안쪽이나 1층 빈 곳에 설치하라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난데없이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계단 아래서 나는 지독한 냄새
혹시 누가 … 머리털이 쭈뼛 섰다

기사 하나가 창문을 열고 위쪽을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다른 집들 실외기도 모두 밖에 달려있었다. 그래도 아줌마는 막무가내였다. 나중에는 그 집 아저씨까지 올라왔다. 기사들은 들은 척도 않고 일을 마쳤다. 별사람들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배관이 길어지면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난다고 했다.  
 
삽질일기

삽질일기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돌아간 뒤 짜장면을 시켜 저녁을 먹는데 아줌마가 또 올라왔다. 어수선한 계단을 왜 청소하지 않느냐고 했다.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게 빗어 넘겨 묶은 머리, 목까지 채운 블라우스 단추, 회칼로 살점을 떼어내는 듯한 목소리,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 꼿꼿하게 허리를 편 자세에는 바늘구멍만 한 빈틈도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부딪쳤다. 현관과 계단 사용에 얽힌 사소한 일들이었다.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매사에 조심하며 살았다. 층간 소음을 문제 삼을 것 같아 방에서도 살금살금 걸었다.
  
무와 배추는 하루가 다르게 품이 넓어지고 고라니 난동도 그만큼 심해간다. 밭 가장자리에는 여름에 떨어진 고수 씨앗이 다시 싹을 틔웠다.

무와 배추는 하루가 다르게 품이 넓어지고 고라니 난동도 그만큼 심해간다. 밭 가장자리에는 여름에 떨어진 고수 씨앗이 다시 싹을 틔웠다.

이 무르익어 5월로 들어서자 주말농장에서 채소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뜯어오면 앞집과 위층을 나누어 주었다. 아래층에도 주고 싶지만 고민스러웠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지라 여전히 껄끄러웠다. 꼬장꼬장한 아줌마 성격도 걸렸다. 약을 치지 않아 채소에 구멍이 숭숭 났는데, 달팽이가 기어 나오면 기겁을 할 수도 있는데. 사람 뭐로 보고 이러세요, 하면 어떡하지.  
 
불난 집 부채질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불을 끄려는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깨끗하고 흠 없는 채소를 골라 큼직한 봉지를 만들어 문을 두드렸다. 아줌마는 의외로 좋아했다. 며칠 뒤에는 잘 먹었다며 직접 부친 갖가지 전을 한 접시 가져왔다. 냉전이 풀린 아랫집과 급속히 밀착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새벽 지독한 냄새 때문에 깼다.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구석구석을 살펴봤지만 집안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밖을 둘러봤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 정도면 동네가 난리가 날 텐데 조용해서 더 이상했다.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지하주차장 공사를 하는 옆 건물, 골목에 새로 깐 아스팔트는 아니었다. 한 바퀴 돌아봤지만 알 수 없었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냄새가 다시 풍기기 시작했다.  
 
얻어다 심은 쪽파가 일주일 만에 이만큼 자랐다.

얻어다 심은 쪽파가 일주일 만에 이만큼 자랐다.

1층 현관을 들어서니 극심했다. 지하에 있는 다용도실로 눈이 갔다. 더럭 겁이 났다. 혹시 저 아래 누가…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냄새가 심해졌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다용도실 앞은 방금 청소라도 한 듯 말끔했다. 그런데 바닥에 뭔가 흥건했다. 거기서 풍겨나오는 악취에 코를 막고 뛰어올라왔다.
 
1층집의 소행이었다. 방역에 쓰는 크레솔에 세제를 섞어 왕창 뿌렸단다. 지하 계단 옆에 둥지를 튼 길고양이 가족을 쫓아내려는 목적이었다. 아래층 단칼아줌마가 주도한 긴급반상회는 만행 성토장이 됐다. 구의원이라는 당사자는 못 온 건지 안 온 건지 나타나지 않았다. 아래층 아줌마가 항의하니 되레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고 목소리를 높이더란다. 이틀 뒤 1층집이 사과문을 붙였다. 선의로 행한 일인데 불편을 끼쳤다는 내용이었다. 냄새는 열흘 넘게 갔다. 길냥이 가족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톱만 한 고마리꽃에도 꿀이 있는지 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손톱만 한 고마리꽃에도 꿀이 있는지 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이 일 덕에 아랫집과는 차 마시러 오가는 사이가 됐다. 밭에 다녀올 때마다 채소를 나누었다. 아저씨가 특히 좋아했다. 명절 때는 선물세트를 들고 오기도 했다. 우리가 다른 동네로 이사 하던 날 아줌마가 아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작은 선물을 내밀며 이사 가도 꼭 연락하자고 했다.
   
만지고 삽질하는 재미로 시작한 농사다. 나눠 먹는 맛도 짭짤하다. 그런데 가까이 사는 친구들보고 밭에 와서 가져가라고 해도 여간해서는 오지 않는다. 같이 땀 흘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 때문일까. 그래서 가끔 배달에 나선다. 신도시에 살 때는 주말이면 봉지를 여럿 만들어 동네를 한 바퀴씩 돌았다. 친구 부인을 마주치면 당황할까 봐 경비실에 맡겨놓고 전화를 했다. 서울로 이사 와서도 틈틈이 그렇게 했다. 지금 내가 사는 집 위 아래와 경비아저씨에게도 나눠드린다. 침 맞으러 다니는 한의원에 방울토마토를 씻어서 한 봉지 가져갔더니 데스크에 웃음꽃이 피었다.
 
“위대한 영도력의 비밀이 뭡네까?”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인민군 리수화가 전쟁도 없고 싸움도 없는 동네의 비결을 묻자 촌장이 이렇게 답한다.
 
“뭘 마이 멕이야 돼”
 
영화에서 ‘먹이는 일’은 한쪽이 다른 쪽에게 베푼다는 뜻이다. 나 혼자 좋아서 하는 ‘채소 셔틀’과는 다른 의미지만 어쨌든 나누는 일은 즐겁다.
 
그림·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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