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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긍정을 입혀라..런던패션위크 하이라이트 4

중앙일보 2019.09.26 05:05
뉴욕에서 시작된 패션위크 여정은 런던을 지나 밀라노, 파리로 이어진다. 2020년 봄‧여름의 시계를 가리키는 패션계의 풍경을 런던패션위크에서 포착했다. 패션위크가 숙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변화, 지금 시대가 패션위크에 바라는 것들, 그리고 런던의 런웨이를 뜨겁게 달궜던 야심찬 디자이너들까지. 지난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열린 런던패션위크의 관전 포인트를 전한다.  
런던=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2020 봄·여름 런던패션위크 관전 포인트 4

사진=영국패션협회(British Fashion Council) 
 
브렉시트가 런던 패션 업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디자이너들은 2020년 봄여름 시즌을 어느때보다도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사진 Stuart Wilson/BFC]

브렉시트가 런던 패션 업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디자이너들은 2020년 봄여름 시즌을 어느때보다도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사진 Stuart Wilson/BFC]

 
1년에 두 번(봄‧여름, 가을‧겨울) 파리‧밀라노‧런던‧뉴욕에서 열리는 패션위크는 업계의 가장 중요한 행사다. 전 세계 패션 전문가들이 모여 새로 선보이는 컬렉션을 감상하고 향후 트렌드를 가늠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패션위크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패션쇼는 무대 시작과 동시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무대 위에 올랐던 옷들이 6개월 후 매장에 걸릴 때는 이미 ‘낡은 패션’일 확률이 높다. 그만큼 순환이 빨라진 패션 생태계에서 바이어와 기자들을 초청해 화려한 쇼를 여는 데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최근 많은 브랜드가 패션위크에 참여하지 않거나, 규모를 축소하거나, 현장 직구(See now, buy now)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퍼블릭 오픈 쇼로 기획된 알렉사 청의 2020 봄여름 컬렉션. 관객석을 가득 메운 이들은 보통 패션쇼의 관객이 되는 셀럽이나 패션계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들이다. 유지연 기자

퍼블릭 오픈 쇼로 기획된 알렉사 청의 2020 봄여름 컬렉션. 관객석을 가득 메운 이들은 보통 패션쇼의 관객이 되는 셀럽이나 패션계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들이다. 유지연 기자

 
어떻게 하면 패션위크의 순기능과 기존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런던패션위크는 이런 문제의식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런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쇼를 유치하는 기본 역할 외에도, ‘지속가능성’이라는 패션계 최대 화두를 주요 테마로 가져왔다. 또한 소비자의 관심을 독려하기 위해 일반인에게도 패션 쇼 티켓을 판매하는 등의 새로운 실험에도 도전했다. 
 

'지속가능성' 타진한 런던패션위크

올해 런던패션위크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이들은 연예인이나 모델이 아닌, 기후변화 방지 운동 단체 ‘멸종 저항(Extinction Rebellion)’이었다. 패션위크 공식 쇼가 열리는 180 더 스트랜드 거리에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염료를 바닥에 뿌리고 드러눕는 ‘다이 인(die-in)’ 퍼모먼스와 함께 커다란 관을 들고 등장해 패션위크의 죽음을 알리는 장례식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환경을 위해 패션위크는 폐지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기후변화 방지 운동 단체 '멸종 저항'이 지난 15일 열린 빅토리아 베컴 쇼장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로이터]

기후변화 방지 운동 단체 '멸종 저항'이 지난 15일 열린 빅토리아 베컴 쇼장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로이터]

 
실제로 계절마다 새 제품을 쏟아내며 소비를 부추기는 패션 산업은 환경오염과 쓰레기 양산의 주범으로 비판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패션'은 이제 업계 전체의 거부할 수 없는 숙제가 됐다. 이번 시즌 런던패션위크에선 지속가능한 패션에 대한 전방위적 시도가 펼쳐졌다. 우선 긍정적 패션, 착한 패션이라는 의미의 주요 테마 ‘포지티브 패션(Positive Fashion)’을 실천하는 다양한 브랜드들을 소개했다.  
 
'포지티브 패션' 전시 중 하나로 기획된 디자이너 에리카 메이시의 의상들. 알루미늄 캔 뚜껑을 재료로 해 마치 뜨개질을 한 니트처럼 정교하게 엮어낸 의상을 선보였다. 유지연 기자

'포지티브 패션' 전시 중 하나로 기획된 디자이너 에리카 메이시의 의상들. 알루미늄 캔 뚜껑을 재료로 해 마치 뜨개질을 한 니트처럼 정교하게 엮어낸 의상을 선보였다. 유지연 기자

 
나이키 운동화를 활용해 키튼힐을 만드는 ‘안쿠타 사라’, 폐전자기기에서 긁어낸 금속으로 주얼리를 만드는 ‘릴리스’, 구매가 아니라 빌리는 것으로 옷의 수명을 늘리는 렌털 서비스 ‘마이워드롭 HQ’, 해양 쓰레기로 만든 수영복 브랜드 ‘스테이 와일드 스윔’ 등 기발한 아이디어 브랜드들이 런던패션위크 전시장을 채웠다. 환경 단체 일원을 초대해 지속가능한 패션에 대한 패널 토크도 진행했다. 뚱뚱한 몸매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초대해 토크 프로그램을 여는 등 ‘긍정적 패션’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콘텐트도 제공했다.  
 
런던패션위크 일반 오픈 세션 중 하나로 기획된 '포지티브 패션 토크'가 지난 17일 열렸다. [사진 Joe Maher/BFC]

런던패션위크 일반 오픈 세션 중 하나로 기획된 '포지티브 패션 토크'가 지난 17일 열렸다. [사진 Joe Maher/BFC]

 
본격적인 패션쇼 무대에서도 긍정적 패션에 대한 호응은 이어졌다. 디자이너 시몬 로샤와 리차드 말론은 다양한 연령대와 사이즈의 모델을 쇼에 세웠다. 롤랑 무레는 네덜란드 브랜드 ‘아치 앤 훅(Arch&Hook)’과 함께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만든 옷걸이를 개발, 이를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긍정적 낭만으로 물든 런웨이

브렉시트가 런던 패션 업계에 미친 우울한 경제 전망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 런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낙천적인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카리스마와 파워를 과시해야 했던 시크한 히로인의 시대는 갔다. 대신 화려한 프린트와 과장된 퍼프, 켜켜이 겹쳐진 러플 등으로 몸을 감싼 로맨틱한 분위기의 여성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오래된 극장에서 드라마틱한 패턴, 프린트의 드레스를 선보인 시몬로샤 2020 봄여름 컬렉션. [사진 시몬로샤]

오래된 극장에서 드라마틱한 패턴, 프린트의 드레스를 선보인 시몬로샤 2020 봄여름 컬렉션. [사진 시몬로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무릎길이 분홍색 드레스를 선보인 몰리 고다드, 식탁보나 벽지에서 볼법한 잔잔한 꽃무늬 프린트의 드레스로 오래된 극장의 불을 밝힌 시몬 로샤, 이탈리아 배우이자 정치가인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에서 영감을 받아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차림의 낭만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여성들을 런웨이로 불러낸 에르뎀, 꾸띄르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드레스로 무대를 채운 리차드 퀸 등이 대표적이다.  
 
여러 겹의 프릴, 볼륨감있게 부풀어 오른 드레스로 사랑스러운 룩을 선보인 몰리 고다드의 2020 봄여름 컬렉션. [사진 John Phillips/BFC]

여러 겹의 프릴, 볼륨감있게 부풀어 오른 드레스로 사랑스러운 룩을 선보인 몰리 고다드의 2020 봄여름 컬렉션. [사진 John Phillips/BFC]

 
야생화가 가득 핀 들판을 스크린 위에 투사한 크리스토퍼 케인은 꽃무늬 프린트의 컷아웃 드레스와 화려한 페이즐리 무늬의 재킷, 흰색 아일렛 드레스 등을 선보였다. 한국인 디자이너 레지나표는 동시대 여성들의 밝고 현실적인 로맨티시즘을 주제로 겨자색·벽돌색 등 따뜻한 컬러 팔레트로 구성된 실크 드레스, 체크무늬 수트 등을 선보였다.  
 
일상적이면서 따뜻한 느낌의 봄여름 의상들을 선보인 레지나 표. 스커트의 햄라인에 달린 플라스틱 장식이 걸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냈다. [사진 레지나 표]

일상적이면서 따뜻한 느낌의 봄여름 의상들을 선보인 레지나 표. 스커트의 햄라인에 달린 플라스틱 장식이 걸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냈다. [사진 레지나 표]

 

패션위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런던패션위크는 혁신적인 실험도 마다치 않았다. 일반 관객들을 위한 ‘공개 패션쇼’를 기획한 것. 패션위크 기간 동안 홈페이지를 통해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6개의 세션을 공개했다. 알렉사 청, 하우스 오브 홀랜드 등의 쇼와 포지티브 패션 관련 토크·전시 프로그램을 함께 구성한 일종의 패키지 상품으로 스탠다드 티켓은 135파운드(약 20만원), 맨 앞자리 프론트 로우 티켓은 245파운드(약 36만원)에 판매했다.   
 
런던패션위크의 일반인 오픈 세션 중 하나인 알렉사 청 2020 봄여름 쇼장을 가득 매운 일반인 관객들. 사전 판매를 진행했던 일반인 오픈 세션 티켓 2000장은 완판됐다. 유지연 기자

런던패션위크의 일반인 오픈 세션 중 하나인 알렉사 청 2020 봄여름 쇼장을 가득 매운 일반인 관객들. 사전 판매를 진행했던 일반인 오픈 세션 티켓 2000장은 완판됐다. 유지연 기자

 
티켓 2000장은 오픈하기 무섭게 모두 팔려나갔다. 공개 패션쇼라고 해서 메인 패션쇼와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10분 내외로 진행되는 메인 쇼보다 공개 패션쇼는 30분 정도로 길게 구성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모델들의 캣워크뿐 아니라 디자이너의 작업 과정, 인터뷰 등의 영상 상영이 더해졌다. 영국패션협회 의장 스테파니 패어는 “창의성은 물론 상업적인 면도 패션위크가 갖춰야 할 주요 덕목”이라며 “대중을 위한 이벤트를 통해 잠재 소비자들을 확대하는 게 일반 공개 쇼의 취지"라고 밝혔다.  
 

전 세계 디자이너를 위한 패션 플랫폼

인도 출신 런던 디자이너 슈프리야 렐라의 2020 봄여름 쇼. 인도 전통 복식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옷들이 인상적이다. [사진 Eamonn McCormack/BFC]

인도 출신 런던 디자이너 슈프리야 렐라의 2020 봄여름 쇼. 인도 전통 복식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옷들이 인상적이다. [사진 Eamonn McCormack/BFC]

 
4대 도시 패션위크 무대는 세계무대 진출과 동의어다. 특히 런던패션위크는 신진 디자이너가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도 인도·중국·한국 디자이너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주목받는 신예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수프리야렐라는 인도 출신의 영국 디자이너로 시어 소재로 된 비대칭 톱, 인도의 전통 의상인 사롱 스타일의 드레스 등을 선보였다. 중국 디자이너 후이샨 장 역시 전통 의상 치파오를 응용한 미니드레스와 작은 구슬이 달린 프릴 드레스 등 여성미를 강조한 의상을 선보였다. 한국 디자이너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가을 런던에 첫선을 보인 박승건 디자이너(푸시 버튼)는 세 번째 시즌을 맞아 아랫단에 볼륨을 준 페블럼 스타일의 재킷과 사이클 바지 등 스트리트 요소를 반영한 봄여름 컬렉션을 공개했다. 
 
아랫단에 볼륨을 준 패블럼 스타일의 재킷, 블라우스 등을 키 룩으로 선보인 박승건 디자이너의 푸시버튼 2020 봄여름 쇼. [사진 푸시버튼]

아랫단에 볼륨을 준 패블럼 스타일의 재킷, 블라우스 등을 키 룩으로 선보인 박승건 디자이너의 푸시버튼 2020 봄여름 쇼. [사진 푸시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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