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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낱말공장 공장장’의 사전 만들기 20년

중앙일보 2019.09.26 00:41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총 341자다. 그런데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돼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중간에 쉼표가 6개나 찍혀 있지만 따라 읽기에 벅차다. 문장으로 치면 꽤 불친절하다. 헌법 전문을 ㈜낱말이 만든 문장검사기로 돌려보았다. 난이도 측정, 맞춤법·띄어쓰기 검사, 유의어 추천 등의 다양한 기능이 들어 있다.
 

사업가 김기형씨의 열정
대규모 유의어사전 완성
온라인 문장교정 기능도
“말글만큼 재미난 것 없어”

헌법 전문은 ‘쉬움→어려움’ 7단계 중 최고난도 수준이다. 법조문이란 특수성을 감안해도 ‘어린 백성들’에게 부담스럽다. 지나친 문어적 표현도 다소 거슬린다.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를 ‘사명에 따라’로,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을 ‘국민투표로 개정’으로 바꾸니 한층 자연스럽다. 어려운 한자도 바꿔 보았다. ‘유구한 역사’ ‘불의에 항거한’보다 ‘오랜 역사’ ‘불의에 맞선’이 더 쏙 들어온다.
 
지역별 방언을 살펴보는 기능도 재미있다. 예컨대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에서 ‘이제’의 사투리로 ‘곰방’ ‘시방’ ‘금시’ ‘금세’ ‘이자’ 등이 제시된다. 다국어 사전도 눈길을 끈다. 문장 번역까진 아직 안 되지만 우리말 개별 단어를 영어·중국어· 몽골어·아랍어 등 11개국 언어로 전환해준다.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과 간단한 필담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가 경쟁력으로 떠오른 시대, 이 문장검사기는 여러모로 유용하다. 사실 영어권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다. 10년 전 선보인 그래머리(grammarly.com)다. 어색한 단어, 그릇된 문장 등을 바로잡아준다. 고급 기능을 사용하려면 일정액을 내야 하지만 문장력을 키우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단어·문법·문장 데이터베이스가 방대하게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의어·반의어·방언 등 다양한 국어사전을 만들어온 김기형 대표. ’사전이란 평생의 친구가 있어 현업 은퇴 후에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중앙포토]

유의어·반의어·방언 등 다양한 국어사전을 만들어온 김기형 대표. ’사전이란 평생의 친구가 있어 현업 은퇴 후에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중앙포토]

㈜낱말 홈페이지(natmal.com)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낱말창고’다. 유의어·반의어·방언·의성의태어 등 여러 종류의 국어사전이 실려 있다. 회사 측이 지난 20년간 축적해온 자료 뭉치다. 특히 유의어 사전이 독보적이다. 23만여 표제어를 63만여 1차 유의어와 200만여 2차 유의어로 분류한 대규모 사전이다. 개별 단어와 비슷한 말, 또 그와 비슷한 말을 한데 묶었다. 맥락·상황에 적합한 어휘를 고르는 데 나침반 구실을 한다. 우리 언어정책을 이끄는 국립국어원조차 시도하지 못한 일이다.
 
여기서 퀴즈 하나. 유의어가 가장 많은 단어는? 정답은 동사 ‘생각하다’다. 낱말창고를 검색해봤다. 원인·고향·이익·앞일·이웃 등 ‘생각하다’의 대상을 분야별로 나눠보니 1차 유의어가 78개, 2차 유의어가 855개 제시됐다. ‘(원인을) 생각하다’의 경우 1차 유의어로 가늠하다·고려하다·궁리하다 등 25개 단어가, 또 ‘가늠하다’의 2차 유의어로 견주다·헤아리다·어림하다 등 16개 단어가 펼쳐졌다.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왜 ‘생각하다’의 유의어가 가장 많은 걸까. 산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할 게 많다는 뜻일까.
 
이들 사전은 한 사업가의 열정 덕분에 탄생했다. 주인공은 ‘낱말공장 공장장’ ‘낱말 창고지기’를 자처하는 김기형(58) 대표다. 그는 2000년 ㈜낱말을 차린 이후 종이·인터넷·모바일 국어사전 20여 종을 만들어왔다. 2009년 전 7권으로 완성한 『우리말 유의어 대사전』을 지난 10년간 의미별로 재분류해 이달 초 다시 온라인에 올렸다. 국어학자·IT전문가 등의 도움을 받아 한 단어 한 단어를 일일이 살폈다. 흥미롭게도 그의 본업은 석유화학공장·발전소 등 플랜트 컨설팅. 유의어·반의어를 연구한 친형 김광해 서울대 교수가 2005년 타계하면서 사전 편찬을 ‘제2의 업’으로 물려받았다. 컨설팅으로 번 돈을 사전 제작에 집어넣었다. 국가·외부 후원은 전혀 받지 않았다.
 
사전은 거의 수익이 남지 않는데.
“좋아서, 즐거워서 한 일이다. 누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니다. 형님의 유업을 90%쯤 이룬 것 같다. 이제 마음이 편하다. 일부 유료 서비스도 있지만 일반인도 큰 불편 없이 쓸 수 있다. 언젠가는 100% 무료 개방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겠다.
“완벽한 사전은 없다. 사용자 제안을 반영하는 개방형으로 꾸려갈 것이다. 무엇보다 용례를 늘려가야 한다. 데이터베이스를 완성했기에 분야·용도별 다양한 사전을 만들 수 있다. 옛날에 나온 좋은 종이사전도 디지털화하고 싶다. 사장되기에 안타까운 게 많다. 곧 한글날이다. 우리말을 풍부하게 썼으면 한다. 세상을 담는 말과 글만큼 재미난 게 또 있을까 싶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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