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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헌 중사 울분 "北지뢰도 버텼는데, 국가가 명예 빼앗아"

중앙일보 2019.09.26 00:06 종합 26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목함지뢰 ‘공상자’ 하재헌 중사를 만나다

하재헌 중사가 하남 미사리 조정 대표선수 숙소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하 전 중사는 2015년 북한의 지뢰 도발로 두다리를 잃고 전역했다. 최승식 기자

하재헌 중사가 하남 미사리 조정 대표선수 숙소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하 전 중사는 2015년 북한의 지뢰 도발로 두다리를 잃고 전역했다. 최승식 기자

대한민국은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는가. 2015년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25) 예비역 중사가 던진 질문이다. 지뢰 사고의 트라우마를 가까스로 이겨내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가 또 한 번 견디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이번엔 상처를 입힌 주체가 우리 정부였다. 국가보훈처가 그의 국가유공자 심사 결과 ‘전상(戰傷)’이 아니라 ‘공상(公傷)’ 군경으로 분류한 것이다. 하 중사는 “왜 저를 두 번 죽이는 겁니까. 다리 잃고 남은 것은 명예뿐인데 명예마저 빼앗아 가지 마세요. 너무 억울하고 분합니다”고 쓴 글을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렸다. 평생 군인의 길을 걷고자 했던 청년의 절박한 호소에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공분을 표시했다.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로 새 삶 도전
공상 판정은 사고 당시 못잖은 충격
북한 눈치 본 것이란 의혹 제기되고
비난 여론 빗발속 10월초 재심 예정

하재헌 중사는 그사이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 입상을 꿈꾸는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 선수로 변신해 있었다. 지난 21일 경기도 하남의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열린 전국 장애인 조정대회 1000m 개인전에서 2위와 현격한 격차를 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무릎 이하 두 다리가 없는 그는 상체가 꽁꽁 묶인 상태에서 팔힘으로만 노를 젓는 PR1 종목에 출전했다. 하 중사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노를 젓는 순간만큼은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어 가장 좋다”고 했다.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좌절과 절망을 딛고 새로운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은 뒤늦게 입문한 조정을 통해 심신을 갈고 닦은 결과였다. 하 중사의 지상 과제는 내년 8월의 도쿄 패럴림픽 출전권을 따는 것이다. 오로지 그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매진해오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은 지난달 중순이었다.
 
처음 ‘공상’ 판정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낌이 어땠나.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호주로 출국하기 직전, 주소지 지방보훈청 담당자로부터 전화로 심사 결과를 전달받았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결과였다. 내가 왜 전상이 아니고 공상이지?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심리적 충격이 대회 결과에 영향을 미쳤나.
“그러면 변명이 되니 더 말하고 싶지 않다. 호주에 가서도 내내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한 건 사실이다. 나의 멘탈(정신력)도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세계 대회에서 16위를 했다. 정식으로 훈련을 시작한지 4개월 만에 거둔 성적치고 나쁜 결과는 아니지만, 상위 7명에게 주는 패럴림픽 출전권은 따지 못했다. 내년 4월의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나가서 몇장 남지 않은 지역 할당 출전권을 반드시 따야 한다.
 
사고를 당한 것은 4년 전인데 왜 이제 그런 통보를 받았나.
“지난 1월 전역한 뒤 유공자 신청을 한 결과가 8월 나온 것이다. 사고가 난 뒤 곧바로 전역하지 않은 것은 비록 두 다리는 사라졌어도 군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간 치료를 거친 뒤 국군수도병원에 배치돼 나처럼 부상으로 전역하는 사람들의 보훈 심사를 도와주는 행정 업무를 하다 조정 선수가 되려고 1월 전역했다. 함께 다친 김정원 중사는 지금도 사이버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 중사가 21일 열린 장애인 조정 대회에 출전해 경기 중인 장면. [뉴스1]

하 중사가 21일 열린 장애인 조정 대회에 출전해 경기 중인 장면. [뉴스1]

하 중사는 직업군인이 되기 위해 대학에서 군사학을 전공하고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 것은 하사 임관 1년여만인 2015년 8월이었다.
 
서부전선 최전방 수색대대에 근무하던 중 비무장지대(DMZ) 수색작전에 나가 철책 통문을 지나려던 참에 불의의 지뢰 사고를 당했다. 그를 구해 후송하려던 선임자 김정원 중사(당시 하사)도 지뢰를 밟아 오른쪽 발목을 잃었다. 군 합동조사단은 현장에서 수거한 폭발물 잔해 등을 조사한 결과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매설한 목함지뢰에 의한 도발로 결론지었다.
 
하 중사는 발목만 잃은 게 아니었다. 양쪽 고막이 파열되고 등과 엉덩이에 화상을 입고 함몰되는 중상이었다. 군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해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중환자실에 있던 45일간 수술만 21차례 받았다. 수술 뒤 강력 진통제 맞고 하루 버티고 나면 또다시 전신마취 수술이 나를 기다렸다. 내가 생각해도 기적적으로 버텨냈다”고 했다.
 
전상이 아니라 공상으로 지정된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들었나.
“나에게 전달된 서류에 ▶교전이 없었다는 점 ▶진돗개 발령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 ▶다른 지뢰 사고 선례와 동일하게 봐야 한다는 등의 이유가 적혀 있다. 내가 국군수도병원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4명이 지뢰 사고로 치료받았고 공상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나는 북한이 아군에게 피해를 줄 목적으로 몰래 설치한 지뢰를 밟은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명백한 도발 행위에 의한 부상이다. 그 뒤 우리 군이 응징의 차원에서 대북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은 포격을 해 왔다. 일상적인 훈련이나 교육 상황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군이 오래전에 설치한 지뢰가 유실되어 떠내려온 것을 잘못 밟은 것이 아니냐며 조사결과를 의심하기도 하는데, 사고 지점은 언덕 꼭대기 부근이었다. 떠내려가는 지뢰가 어떻게 꼭대기로 올라가나.”
 
보훈처가 ‘공상’ 판정을 내린 경위를 되짚어 보면 이렇다. 국가유공자 신청이 접수되면 보훈심사위원회를 열어 등급을 결정하는데 부상 부위별로 나눠진 분과위원회에서 정해지는 게 통상적 관례다. 하지만 하 중사의 경우는 분과위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해 보훈심사 상임위원과 의사·변호사 등 11명으로 구성되는 전체회의로 올라갔다.
 
지난달 7일 11명이 표결을 한 결과 공상 판정이 내려졌다. 보훈처 관계자는 “전상이냐 공상이냐를 놓고 아슬아슬하게 엇갈렸다”고 말했다. 6대5로 표결이 이뤄졌다는 의미다. 표결 참석자 가운데 상임위원은 정진 위원장과 성춘일 변호사 및 보훈처 간부 2명 등 4명이다. 정 위원장은 민주당 당료 출신으로 파주 지역에서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하 중사가 사고를 당한 곳도 파주 지역이다.
 
표결 당시의 심의의결서에 따르면 진돗개 발령이 없었기 때문에 전시 내지 준(準)전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 전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로 적시됐다. 하지만 그런 논리대로라면 천안함 사건처럼 진돗개 발령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당하는 기습 공격이나 폭격·포격에 군인이 숨져도 전사자로 인정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또 한가지 주요 이유는 지뢰 사고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이 보훈 관계 법령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국방부가 군인사법 시행령의 전상자 분류기준을 개정해 하 중사를 전상자로 인정한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소극적인 해석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하 중사에 대한 공상 판정 소식이 알려지자 “북한의 소행임을 부정하거나,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말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공상 판정을 내렸다면 그건 하 중사 본인의 표현대로 ‘두 번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 중사 본인도 청원문에서 “북한과의 화해 교류 등으로 인하여 이러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라고 썼다.
 
하 중사는 공상 판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해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10월 초 재심 회의를 여는 쪽으로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그 사이 문재인 대통령도 “법조문을 탄력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화려한 전공을 쌓은 장수나 지휘관만 영웅이 아니다. 남들이 가지 않은 직업 군인의 길을 선택하고 국방 임무를 수행하다 극한의 부상을 당한 하 중사야말로 이름없는 영웅 중의 한 명으로 남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하 중사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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