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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 英정치···존슨 총리 등장후 벌어지는 희귀한 장면들

중앙일보 2019.09.25 14:54
뉴욕에서 대법원이 자신의 의회 정회 조처를 불법으로 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AP=연합뉴스]

뉴욕에서 대법원이 자신의 의회 정회 조처를 불법으로 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AP=연합뉴스]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브렉시트 문제를 다루는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7월 보리스 존슨 총리가 취임한 이후 전대미문의 사건이 잇따른다. 급기야 영국 대법원이 역사상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판결을 내놨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정치적 난장판은 성문헌법이 없는 관습법의 나라 영국을 뒤흔들고 있다.
 

여왕 재가한 의회 정회에 대법원 불법 판결
"존슨이 의회의 브렉시트 임무 수행 막았다"
취임후 6차례 표결 참패…최단명 총리 위기
존슨 "안 물러나", 브렉시트 연기→총선할 듯
소송 제기한 이민자 출신 지나 밀러 스타덤

 영국 대법원은 존슨 총리가 의회를 5주씩이나 정회토록 한 조처가 불법이어서 무효라고 지난 24일(현지시간) 판결했다. “의회가 브렉시트 관련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막았고, 민주주의 핵심에 극단적인 영향을 미쳤다"(브렌다 헤일 대법원장)며 법적 효력이 없어 의회는 정회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판시했다. 존 버커우 하원 의장 등은 25일 즉각 의회를 다시 열었다.
브렌다 헤일 영국 대법원장이 존슨 총리의 의회 장기 정회가 불법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브렌다 헤일 영국 대법원장이 존슨 총리의 의회 장기 정회가 불법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BBC는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관습 헌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이너마이트 같은 판결이어서 그 중요성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설명했다. 대다수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명문화된 헌법을 가진 것과 다르게 영국은 성문헌법이 없다. 대신 수백 년 동안의 법과 관례에 기반해 국가가 운영되고 법정에서도 판단을 내린다.
 
 존슨 총리의 의회 장기 정회에 대해서도 스코틀랜드 법원은 불법이라고 했지만, 잉글랜드 법원은 법정에서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다른 의견을 냈다. 그래서 최고 법정인 대법원으로 갔는데, 영국의 대법원은 불과 10년 전인 2009년 10월에 설립됐다.  
 
 더욱이 총리의 정회 요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되기 때문에 판결 대상이 된 적이 없다. 하지만 대법원은 존슨 총리가 여왕에게 5주씩이나 정회를 요청한 행위가 불법이라고 했다. 통상 의회 회기가 바뀔 때 이전 총리는 일주일 안팎 정회를 추진했었다. 대법원은 브렉시트 시한인 10월 말을 코앞에 두고 존슨 총리가 의도적으로 의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고 봤다. 이번 판결로 존슨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여왕까지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존슨 총리의 사임을 요구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 [AP=연합뉴스]

존슨 총리의 사임을 요구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 [AP=연합뉴스]

 
 존슨 총리는 취임 후 하원에서 6차례 진행된 중요 의회 투표에서 모두 패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신임 총리와 허니문을 가져온 영국 의회의 문화를 고려할 때 전례가 없다. 존슨은 표결 과정에서 당론을 어긴 보수당 의원 21명을 당에서 축출했다. 아무런 합의 없이 떠나는 노 딜(no dael) 브렉시트도 불사하겠다는 그의 방침에 반발한 여당 의원들을 내쳐 당내에서조차 반발을 샀다. 막무가내식 국정 운영은 그가 하원에서 연설하는 동안 의사당 복도를 지나 건너편 야당 석으로 걸어가 탈당하는 의원도 나오게 만들었다. 모두 존슨 총리가 만들어낸 희귀한 장면들이다.
 
 무엇보다 대법원의 판결이 존슨 총리에게 최악의 결과였다. “국가를 잘못 인도한 존슨 총리는 즉각 사임하라"(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등 야당에서 퇴진 요구가 쏟아졌다. 브렉시트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보수당을 쓸어버리겠다고 협박해온 노 딜 브렉시트 찬성파 라어절 패라지도 "의회 장기 정회는 최악의 수였다"며 존슨에게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의를 표하라고 압박했다. 역대 최단명 총리가 될 처지에 몰린 것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AP=연합뉴스]

영국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AP=연합뉴스]

 
 하지만 존슨 총리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취재진을 만나 사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존슨은 “안 물러날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유엔 총회에 참석했던 존슨은 부랴부랴 런던 행 비행기에 올랐다.
 
 버티는 존슨 총리에 대해 의회가 불신임안을 처리하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이 경우 브렉시트 시한 전에 총선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노동당이 찬성하지 않을 전망이다. 노동당이 과반 확보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자칫 존슨의 수에 말려 노 딜 브렉시트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 딜 방지법안을 처리한 바 있는 하원은 남은 기간 비슷한 취지를 더 확실히 하는 방안을 찾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패라지는 브렉시트가 일단 연기된 후 총선을 치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브렉시트 관련 소송을 잇따라 제기해 승리한 지나 밀러 [AFP=연합뉴스]

브렉시트 관련 소송을 잇따라 제기해 승리한 지나 밀러 [AFP=연합뉴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인도계 이민자 출신의 벤처 사업가 지나 밀러가 소송을 제기한 데에서 비롯됐다. 어느 정당에도 소속돼 있지 않지만 존 메이저 전 총리가 조언하는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그를 후원한다. 1965년 영국령 가이아나에서 변호사의 딸로 태어나 10살 때 영국 기숙학교로 왔다. 학비를 벌려고 호텔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그는 밝혔다.  
 
밀러는 지난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가결되자 “정부가 의회 승인을 거치지 않고 EU를 탈퇴하는 리스본조약 50조를 발동할 수 없다”며 소송을 내 승리했다. 이에 따라 테리사 메이 전 총리와 존슨 총리까지 브렉시트 합의안에 하원의 동의를 구해야 하게 됐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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