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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여제 대결' 탄핵 반대했던 펠로시, 왜 트럼프에 칼 뽑았나

중앙일보 2019.09.25 08:20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24일 오후 5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탄핵 조사 절차 개시를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24일 오후 5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탄핵 조사 절차 개시를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여제' 낸시 펠로시(79) 미 하원의장이 24일(현지시간) 취임 264일 만에 '황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칼을 뽑았다. "나라를 두쪽 내는 대통령 탄핵은 추진할 수 없다"며 헌법상 대통령을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권한(탄핵소추권)을 쥐고도 당내 탄핵파를 눌러왔던 펠로시 의장이 탄핵 개시로 180도 마음을 바꾼 이유는 뭘까. 

"우크라이나 대통령 바이든 뒷조사 청탁 시인,
'한방'없던 러시아 특검보다 국민 이해 쉬워"
원내 상임위, 간부회의 탄핵 여론 급증 확인
7월 95명 부결→하원 과반(218명) 통과 자신
탄핵 반대 여론 60%, 반전 없으면 역풍 우려

 
표면적으론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25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에서 민주당 대선 주자 1위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뒷조사를 압박한 사실을 시인했다는 게 이유다. 현직 대통령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외국 정상에 야당 대선 주자의 뒷조사를 청부하고, 이 사실이 공개되자 행정특권을 이유로 당시 통화록과 내부고발자의 고발장의 의회 제출을 막아 의사 진행을 방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자 권력남용이라는 것이다.
 
펠로시 의장도 민주당 하원 의원총회를 마친 뒤 탄핵 조사 개시 발표 회견에서 "지금까지 대통령이 한 행동은 헌법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책임져야 한다.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자신에게 정치적 이익을 줄 조치를 취해달라고 부탁한 사실을 시인했다"며 "대통령의 행동은 헌법을 수호한다는 취임 선서를 배신하고 우리 국가안보를 배신하고, 우리 선거의 진실성을 배신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밝혔다. 직전 더 애틀랜틱과 인터뷰에선 "이번 일은 대중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사건"이라고도 했다. '결정적 한 방'이 없었던 러시아 대선개입 공모 의혹보다 훨씬 국민이 납득하기 쉬운 탄핵 사유라는 뜻이다.
 
펠로시가 입장을 바꾼 더 큰 이유는 민주당 내 대선주자 1위 바이든을 공격한 데 당내 여론이 급속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펠로시의 결심은 이날 탄핵과 관련된 6개 핵심 상임위원장단과의 비공개 회동과 전체 민주당 간부회의(코커스)를 거쳐 당내 탄핵 여론이 급증한 것을 확인한 뒤 이뤄졌다"고 전했다. 최소한 하원에서 민주당 의원 235명 중 218명 이상 탄핵안을 가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지난 7월 16일 앨 그린 의원의 탄핵 결의안이 부결될 때는 찬성 95표, 반대 332표로 민주당 하원의원 중에도 반대가 140명이 나왔었다. 당사자인 바이든과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대선주자 '빅3'와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조차 펠로시 의장의 행동을 촉구한 것도 영향을 줬다.
 
그럼에도 현 상황은 여당 공화당의 반대로 펠로시가 지난 3월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선 밝힌 '초당적 지지' 조건엔 못 미친다. 펠로시 의장은 "탄핵은 아주 설득력있고, 압도적이며 초당적인 무언가가 없다면, 이 나라를 너무 분열시키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가 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트럼프는 (탄핵을 추진해) 우리나라를 분열할 만큼 가치가 있지도 않다"고 했었다.
 
자칫 칼을 뺐다가 국민 여론이 부정적이어서 민주당에 대한 역풍을 우려한 때문이다. ABC·워싱턴포스트(6월 28일~7월 1일) 조사에서 '의회가 탄핵 절차를 개시해야 한다'는 37%, 개시하지 말아야 한다가 59%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같은 기관의 3월 26~29일 조사 결과, '해야 한다(41%), 하지 말아야 한다'(54%)보다 부정적 여론이 커졌다. 지난 3월 말 로버트 뮬러 특검의 수사 결과, 2016년 러시아 대선 개입과 트럼프 캠프가 공모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데 따른 것이다.
 
펠로시는 2007년 하원의장 때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 증거 없이 이라크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의 당내 탄핵 추진론에 "탄핵을 시작하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며 역풍 우려를 들어 가로막은 전력이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소위 모니카 르윈스키와 불륜 스캔들을 이유로 공화당이 탄핵을 추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부작용을 잘 알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백악관에 근무하는 정보기관 관리의 감찰실 내부 고발로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지난 18일 처음 공개된 뒤 탄핵 찬반 여론 조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여론의 향배가 펠로시의 선택이 옳았는지, 당내 압박에 떠밀려 최대 실책을 저질렀는지 판가름할 전망이다.
 
뉴욕=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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