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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건 국물에 닭모가지 둥둥…새엄마 미워 밥상 엎은 소년

중앙일보 2019.09.25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07)

명절은 지났지만 마음에 와 닿는 풍경이 생각나서 지인에게 허락받아 써본다. 올해 가을이 특별히 행복해진 지인은 뒷산에서 주운 밤 한 자루를 갖고 와서는 이산가족이던 여동생 만난 자랑을 그만큼 하고 간다.
 
10살 때 어머니를 여윈 지인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새엄마가 들어오고 딸을 하나 낳았는데 지인은 새엄마가 너무 미워서 맨날 못된 생각으로 하루를 다 보냈다. 어느 날도 점심때가 되어 새엄마는 닭을 한 마리 잡았다.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헤어진 여동생을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지인은 어릴 적 '닭 모가지 사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진 pixabay]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헤어진 여동생을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지인은 어릴 적 '닭 모가지 사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진 pixabay]

 
푹 고아서 밭일을 함께 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데, 자기 밥그릇에 담긴 국을 보니 ‘애걔, 멀건 국물에 닭 모가지만 달랑 들어있더라’는 것이다. 그날 어디서 그런 힘이 났던지 밥상을 뒤집고 난리가 났다. 불쌍한 울 어매는 죽어버리고 없는데 아버지까지 저 여자한테 빼앗기고 이것저것 너무 미웠단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고개 넘어 십 리가 넘는 할머니 댁에 가서 엉엉 울며 일러바쳤다. 억장이 무너진 할머니가 맨발로 달려왔다. 새엄마는 딸아이를 뺏긴 채 그 사건으로 인해 쫓겨났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지만 그 옛날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다.
 
“할머니가 성격이 호랑이셔서 엄청 무서웠거든.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철이 없었던 거지. 닭 한 마리 고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푸다 보니 때마침 그릇에 닭 모가지가 들어 온 건데, 나도 미워했지만 그녀도 내가 미워서 일부러 그런 거라 생각했거든. 띠동갑 어린 여동생도 할머니가 맡아 키웠는데 그 당시에 가난한 건 기본이라 우째 자랐는지 잘 몰라도 난 동생을 맨날 업고 다녔고 우린 사이좋게 잘 살았제.”
 
그런데 시간이 흘러 여동생은 엄마가 쫓겨난 사연을 알고 자기를 미워하더니 시집을 가서는 발길을 뚝 끊었다. 높은 산이지만 산 하나만 넘으면 여동생이 살고 오빠가 살아도 서른 해가 넘도록 왕래하지 않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지인은 늘 닭 모가지 사건을 옛날 이야기하듯 하며 여동생을 애틋하게 그리워했다. 아마 텔레파시가 통한 것 같다. 그립고 그리운 여동생이 자식을 거느리고 온 것이다. 대문 앞에서부터 통곡하며 오빠를 불렀다. 부인이 먼저 알아보고 버선발로 달려 나와 “엑시야, 엑시야(이전엔 시누이를 아기씨라 불렀다. 경상도 줄임말로 엑시라고 한다)” 하며 붙들고 울었단다.
 
“오빠, 오빠 부르는데 억장이 무너지더라고.”
“제 엄마도 죽고, 시부모에게 정붙이고 살았는데 시부모도 모두 돌아가시고, 명절이 와도 갈 곳이 없어서 내가 생각나더래” 하며 감동으로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눈물은 슬플 때만 나는 것이 아니다. 기쁠 때 나는 눈물은 상처도 치유한다.
 
감정이란 참 묘해서 작은 불씨에 폭발하기도 하고, 쌓아놓은 애정전선이 무너지기도 한다. [사진 pxhere]

감정이란 참 묘해서 작은 불씨에 폭발하기도 하고, 쌓아놓은 애정전선이 무너지기도 한다. [사진 pxhere]

 
농경시대, 산업화시대 다 지났어도 우리의 명절은 문화로 남아있다. 이참에 새로운 명절의 의미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어떤 이유로도 화해하기 좋은 날 아닌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나노보다 더 미세한 감정 타이밍이 있다. 잘못 맞춰지면 작은 불씨에도 대폭발이 일어나기도 하고 애써 쌓아놓은 애정전선에 철조망이 쳐지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극적인 순간이 있는데, 어떤 장면은 그 시점이 너무 잘 맞아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지내다가 명절이란 타이밍에 맞춰 서로에게 큰 감동으로 전해진 것이다. 감정이란 참 묘하다.
 
나도 좋은 친구와 소소한 문제로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지낸다. 나이 들어서도 쪼잔한 자존감에 타이밍을 놓쳤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다음 명절을 이용할까 생각 중이다. 나이 들어도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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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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