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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지우기 하더니, 독립운동가까지" 구미시장 또 논란

중앙일보 2019.09.25 05:00
지난 23일 찾은 구미 산동면의 물빛공원. 왕산루로 예정돼있던 전통 누각의 명칭이 산동루로 변경돼 있다. 사진=백경서 기자

지난 23일 찾은 구미 산동면의 물빛공원. 왕산루로 예정돼있던 전통 누각의 명칭이 산동루로 변경돼 있다. 사진=백경서 기자

경북 구미에서 첫 진보 성향 후보로 당선된 장세용 구미시장(더불어민주당) 이 역사 지우기 논란에 휩싸였다. 구미 공단 50주년 홍보영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고 진보 대통령만 넣은 데다,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한 공원 광장과 누각 명칭까지 일방적으로 바꾸면서다. 장 시장은 “박 전 대통령을 뺀 건 실수로 정치적 의도는 없다. 광장 명칭은 지역명을 반영했다”는 입장이다.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 기리기 위한
광장·누각 명칭, 논의 없이 바꿔 논란
구미공단 50주년 기념영상엔 박정희 빠져

지난 23일 대구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의 장손자 허경성(93)씨 부부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주민공청회까지 열어 결정한 명칭을 후손과 의논도 없이 바꾸는 게 말이 되느냐”며 “지난달 공원을 찾아 바뀐 걸 확인하곤 가슴이 무너졌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왕산 가문 기념 동상, 1년 넘게 창고에

 
남유진 전 구미시장 때인 2016년 9월 구미시는 왕산 허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왕산광장(8000㎡)과 전통누각인 왕산루, 왕산가문의 독립운동가 14인 동상을 만들기로 했다. 한국수자원공사가 56억을 들여 2015년부터 구미시 산동면 국가산단 4단지에 조성 중인 물빛공원(3.6만㎡)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 갑자기 왕산광장은 산동광장으로, 왕산루가 산동루로 변경됐다. 구미시는 “지역명을 반영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왕산가문 독립운동가 14인 동상은 갈 곳을 잃고 충북 공주의 한 공장 창고에 1년 넘게 보관돼 있다. 
 
허경성씨의 아내 이창숙(88)씨는 “동상이 세워진다길래 기쁜 마음에 남편과 공장까지 가서 동상 제작 과정을 봤는데 시장이 바뀌며 물거품이 됐다”고 했다. 
구미 물빛공원에 조성 예정이었던 왕산 가문 14인 독립운동가 동상. [사진 한국수자원공사]

구미 물빛공원에 조성 예정이었던 왕산 가문 14인 독립운동가 동상. [사진 한국수자원공사]

 
구미 출신 왕산 허위 선생은 을사늑약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1908년 체포돼 사형당했다. 안창호·안중근 의사 등과 같은 독립유공자 서훈 1등급이다. 왕산 가문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14명을 배출해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서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안동)과 함께 독립운동 3대 명문가로 꼽힌다. 
 
허위 선생의 손자인 허씨는 1926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 후 철도회사에서 일했다. 해방 직후 어머니·누이들과 한국을 찾았지만, 오자마자 보따리 도둑에 전 재산을 잃었다. 약방을 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댔던 허씨 아버지 허학은 생사조차 모른다. 허씨는 대구시청에서 20여년 공무원으로 근무한 뒤 공인중개업을 했다. 40대 중반에 왕산 허위 선생의 구미 생가터를 당시 소유자 판다는 소식에 대출을 받아 구매했고 이를 갚기 위해 10년간 중국집을 운영했다. 독립운동가의 장손주는 그렇게 중국집 2층 20여평 남짓한 집에서 45년을 살았다. 어렵게 산 생가터도 구미시에 기부채납해 2009년 왕산 기념관과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구미시장, 후손과 면담 중에 고성 논란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인 허경성(왼쪽)씨와 아내 이창숙씨가 지난 20일 경북 구미시청 앞에서 허위 선생을 기리는 시설의 명칭을 일방적으로 변경하지 말라며 장세용 구미시장을 상대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구미일번지]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인 허경성(왼쪽)씨와 아내 이창숙씨가 지난 20일 경북 구미시청 앞에서 허위 선생을 기리는 시설의 명칭을 일방적으로 변경하지 말라며 장세용 구미시장을 상대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구미일번지]

 
노부부는 지난 20일 구미시청 앞에서 “'왕산' 명칭을 돌려달라”며 시위를 했다. 당시 장 시장과의 면담이 이뤄졌으나 장 시장은 “우리 할배는 독립운동 해도 산소도 없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장 시장이 자기 가문의 독립운동가를 내세우기 위해 명칭을 바꿨다”고 주장한다. 구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7월11일 장 시장은 한국수자원공사 구미사업단을 찾아 “왕산광장을 조성하고 있는 지역은 독립운동가 장진홍(독립운동서훈 3등급) 선생이 태어난 일대라 장진홍 선생 기념 사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장 시장과 같은 인동 장씨 가문인 장진홍 선생은 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자결했다.
 
 
 

보수단체 “박정희 지우기 하더니 모든 역사 지우려 한다”

 
앞서 지난 18일 열린 구미 공단 50주년 행사에서 구미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고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만 등장시킨 홍보 영상을 틀어 논란이 됐다. 자유대한호국단 등 보수단체는 구미시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진보 대통령들이 구미공단을 위해 한 일이 뭐냐”며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구미시장이 되니 구미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려 한다”고 했다. 조근래 구미 경실련 사무국장은 “장 시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역사 지우기에 집착하더니 독립운동 역사까지 지워버리려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대한호국단, 턴라이트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23일 오전 경북 구미시청 앞에서 '구미공단 50주년 홍보영상 박정희 뺀 장세용 구미시장 규탄집회'를 벌이고 있다. [뉴스1]

자유대한호국단, 턴라이트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23일 오전 경북 구미시청 앞에서 '구미공단 50주년 홍보영상 박정희 뺀 장세용 구미시장 규탄집회'를 벌이고 있다. [뉴스1]

이에 대해 장 시장 측은 “우리 가문 독립운동가를 내세우기 위해 명칭 변경을 하라는 지시를 한 적은 없고, 동상은 왕산 기념관으로 옮기려 했다”며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예우를 다 하지 못한 점에 대해선 죄송하다”고 말했다. 구미 공단 영상에 대해선 “신중하지 못했다. 다시 제작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구미=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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