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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해전사·태백산맥…이 책 8권이 386 의식 뿌리

중앙일보 2019.09.25 01:40 종합 5면 지면보기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가 당시 접한 이념 서적들은 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386세대는 제도권 교육에서 배운 것과 정반대의 시각을 접하고 의식의 ‘재탄생’을 경험했다. 이런 책들은 선배들이 대학에 새로 입학한 후배들에게 추천하며 위 학번에서 아래 학번으로 전해져 내려갔다. 386세대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책들을 소개한다.
 

[창간기획]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창비사, 1974)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 세대를 상징하는 책이다. 기자 출신으로 당시 한양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고(故) 리영희 선생이 베트남 전쟁, 중국의 문화대혁명, 일본 경제의 대두 등 당시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진보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자서전에서 “(리 선생은) 미국의 패배와 월남의 패망을 예고했다”며 “그 예고가 실현된 것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면서 (...) 희열을 느꼈다”고 썼다.
 

관련기사

『자본론』 (카를 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89)

 
마르크스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된 인물이었다. 고(故) 김수행 서울대 교수는 마르크스의 대표작 ‘자본론’을 전문 연구자로선 처음으로 번역 출간해 파문을 일으켰다. 생전에 김 교수는 “당시에도 자본론이 금서 목록에서 해제되지 않았지만, 서울대 교수가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번역 출판해 버리니 경찰과 검찰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라고 회고했다. 자본론의 번역을 계기로 마르크스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한길사, 1979)

한겨레신문을 창간한 고(故) 송건호 선생이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박명림(연세대 교수)·이종석(전 통일부 장관) 등과 함께 펴낸 책. 10년 동안 연인원 59명이 참여했고 총 6권이 나왔다. 지배계급에 맞서는 민중, 외세에 맞서는 민족의 관점에서 1945~1953년까지의 국내외 역사를 부문별로 상세히 분석한 연구 모음집이다. 386세대가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데 교과서 같은 역할을 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조영래, 돌베개, 1983)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일생을 조명한 책.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전 열사의 어머니로부터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 등을 전해 받아 이를 토대로 정리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처음 나왔을 당시엔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못했다. 조 변호사의 타계 이후인 1991년 첫 개정판에서야 저자의 이름과 함께 『전태일 평전』이란 지금의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전태일은 반드시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소리칠 것”이란 서문의 글처럼, 386세대와 넥타이부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태백산맥』(조정래, 한길사, 1983)

1983년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해 1989년 10권으로 완성된 역사 대하소설. 해방 이후와 6·25전쟁 기간에 전남 벌교를 배경으로 전개된 소작농의 봉기와 빨치산 투쟁 등을 묘사해 한국사회의 계급적·민족적 모순을 그려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금기를 깬 이 소설에 당시 대학생들은 열광했다. 문단에서 ‘80년대 최고의 소설’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1997년 국내 다권본 최초로 100쇄 출간 기록을 세웠다.
 

『역사란 무엇인가』(에드워드.H.카, 김승일 역, 범우사, 1977)

영국의 외교관·언론인·역사학자인 에드워드 해럿 카가 공개 강연한 내용을 엮은 역사 이론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란 구절이 유명하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생각,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적인 인간에 대한 관념은 386세대에게 큰 울림을 줬다. 김기봉 성균관대 교수는 이 책을 “80년대 변혁 운동에 온몸을 내던졌던 청년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평가했다. 영화 ‘변호인’에선 이 책을 두고 “불온서적”이란 검사와 “서울대의 필독 권장도서”란 변호사가 공방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철학 에세이』(조성오, 동녘 ,1983)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생활 속 사례와 일화로 쉽게 풀어쓴 입문서. 야학에서 일하던 서울대 법대 77학번 조성오씨(현 변호사)가 여러 자료를 모아 엮어냈다. 1980년대 캠퍼스에서 운동권 선배들이 신입생에게 맨 처음 권하는 ‘시각교정용’ 책이자, 노동자들의 ‘의식화 필독서’로 명성을 얻어 인문서 최초로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1990년대에도 연평균 1만부씩 팔렸다.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1950년 6월 25일 누가 먼저 사격했는가를 찾지 말라”며 6·25 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을 주장한 책. 1981년 미국 현지 출간 때부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커밍스는 1945년 해방 때부터 한반도는 이미 사실상의 냉전 상태였기 때문에 6·25 당일 누가 먼저 침공했는지는 큰 의미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 같은 관점은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의미가 있어 386세대가 군사정권의 반북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는 이론적 토대가 됐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각종 사료가 추가 공개되면서 6·25는 사전에 면밀히 계획된 침공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수정주의적 접근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탐사보도팀=김태윤·최현주·현일훈·손국희·정진우·문현경 기자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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