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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김정은이 주목하는 세 가지 숫자

중앙일보 2019.09.25 00:05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정은이 매일 상기하거나 주목하는 숫자가 있을까. 있다면 정권 생존과 직결될 만큼 중요한 숫자일 것이다. 향후 비핵화의 향방이 이것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정도로 중요한 숫자는 무엇일까.
 

쌀값 변동과 외환보유고 급감은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숫자
공포와 과학이 맞붙은 판에서
새로운 셈법은 북한이 내놓아야

첫째는 12월 31일이다. 김정은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자 4월 최고인민위원회 연설에서 미국의 용단을 올해 말까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변화가 없으면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연말을 시한으로 못 박았을까.
 
북한은 시한을 정함으로써 협상의 레버리지를 키우려 하고 있다.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은 제재 때문에 비핵화 협상에 나왔음을 은연 중 시인했다. 수를 읽힌 북한은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미국의 믿음을 바꾸지 않고선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북한은 시간의 총구(銃口)를 내년 11월 재선을 앞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돌리려 했다. 새로운 길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 재개가 될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라고 미국을 압박하는 것이다.
 
연이은 단거리 발사체 도발도 시간은 북한 편이라는 ‘신호주기’의 일환이다. 짧은 시간에 기술 개량을 과시함으로써 북한이 만족할 수 있는 협상안을 조속히 마련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새로운 길’을 ‘속 빈 위협’으로 간주한다. 북한이 2017년 하반기 상황으로 돌아갈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입게 될 손해는 재선 실패에 그치겠지만 김정은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우호적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방안이 먹히지 않자 북한은 화풀이로 한국 정부에 막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만큼 답답하고 절박하다는 신호다.
 
둘째는 북한 쌀 1㎏의 가격인 5000원이다. 제재가 직접 충격을 주는 대상은 ‘무역과 외화벌이’지만 그 효과는 시장까지 파급된다. 무역통계에 따르면 북한은 해마다 20~30만 톤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밀수까지 합하면 실제 수입은 이보다 2~3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제재로 인해 외화 벌이가 줄면 이전 규모로 수입하기 어려워 시장에 공급되는 식량이 감소한다. 또 주민 소득도 낮아지기 때문에 식량을 예전처럼 살 수 없다. 그 결과 세 끼 쌀밥을 먹던 주민도 값싼 옥수수를 섞어 먹든지 끼니를 줄여야 한다. 당연히 북한 정권에 대한 주민의 반발이 거세질 수 있다.
 
북한 쌀 가격은 지금도 제재 이전과 같이 5000원선에서 등락하고 있다. 쌀의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비슷한 규모로 줄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재 충격이 쌀과 같은 기초생필품 소비를 줄일 정도엔 아직 이르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긴 어렵다. 혹은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 등이 제공한 식량 원조의 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재로 외화 수입이 줄고 주민 소득이 감소하는 가운데 원조마저 끊어지면 식량난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는 김정은도 알지 못하는 숫자, 바로 북한의 외환보유고다. 외화만 있으면 식량도 수입할 수 있으니 이것이 더 큰 문제다. 지금 북한은 국가 기관과 기업이 외환 관리를 따로 할 정도로 외환집중제가 유명무실해졌다. 군·노동당·내각·지방정부도 그 산하 기업을 통해 각자 외화를 벌어 운영한다. 제재 이전 북한 권력층은 무역액의 상당 부분을 킥백(kickback)으로 받아 부를 축적했다. 주민들도 해외파견 근로나 밀수, 시장 활동 등을 통해 외화를 모을 수 있었다. 김정은을 비롯해 거의 모두가 외화 주머니를 각자 차고 있는 셈이어서 다 합쳐 얼마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제재가 외화 수입을 감소시킨다는 것은 법칙과 같다. 제재가 효과를 내기 시작한 2017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북한은 40억 달러 이상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이 중 밀수출로 전환된 부분과 다른 외화 수입을 감안하면 매년 10억 달러 내외의 외화수지 적자가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장형수·김석진은 2018년 말 북한의 외환보유액을 25~58억 달러로 추정했다. 추세대로라면 이를 경우 2021년, 늦어도 2024년에는 외환보유고가 영(零)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부 보유 외환은 그 전에 바닥날 수 있다. 민간 보유 외화를 정부가 흡수하려 해도 민심 이반이나 국유재산 사유화라는 큰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또 상당액의 외화는 외국에 은닉돼 있을 것이므로 가용하기 쉽지 않다. 수입을 줄이려 해도 수입품 판매를 통해 겨우 버티고 있는 국가 기관, 그리고 수입 원자재가 없으면 가동이 중단되는 기업이 문제다.
 
김정은이 연말로 시한을 정한 이유는 언젠가 식량 가격이 요동치고 외환보유고가 바닥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반면 미국은 비핵화를 제재의 과학으로 읽고 있다. 공포와 과학이 맞붙은 판에서 새로운 셈법을 가지고 실무회담에 나와야 하는 쪽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다. 그렇지 않고선 연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열리더라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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