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세정의 시선] “난 중국인”…탈북자들이 숨어산다

중앙일보 2019.09.23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서 고인들의 이웃 주민 모녀가 영정을 들었다. 장세정 기자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서 고인들의 이웃 주민 모녀가 영정을 들었다. 장세정 기자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이 21일 서울 광화문에서 거행됐다. 탈북자들은 모자의 사인 규명 등을 요구하며 공식 장례식을 거부해 이날 행사는 추모 행사 차원에서 치렀다. 장세정 기자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이 21일 서울 광화문에서 거행됐다. 탈북자들은 모자의 사인 규명 등을 요구하며 공식 장례식을 거부해 이날 행사는 추모 행사 차원에서 치렀다. 장세정 기자

"요즘 탈북자들은 누가 물으면 중국인(또는 조선족)이라고 신분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 건설 현장 등 일용직은 물론이고 편의점·수퍼·커피숍에서 일하는 탈북자들도 마찬가지다. 탈북자를 '배신자'라고 낙인 찍은 주사파가 정권을 잡았으니 어쩔 수 없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북한학 박사 학위를 딴 엘리트 여성 탈북자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아사(餓死) 탈북 모자' 한성옥(42)·김동진(6)의 넋을 기리는 서울 광화문 분향소(교보문고 앞)를 일곱 번째 찾아간 자리에서 이런 충격적인 증언을 들었다. 그는 "보통의 남한사람들은 탈북자를 중국인보다 낮춰 보고 그런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탈북자들은 자기 보호 본능 차원에서 탈북자란 사실을 감추고 중국인 행세를 하게 된다"고 전했다.  

공공연히 "북한 배신자"라고 낙인
이 정부 들어 불이익 심하다 호소
자기 보호 본능에서 신분 감춰
탈북 모자가 서울서 굶어 죽어도
'사람이 먼저'라면서 조문도 안 해
"탈북자 외면 통일부 해체" 요구도

 사선을 넘어 이 땅에 온 3만3000명 탈북자의 고충을 짐작은 했지만,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더 많은 탈북자의 경험과 증언을 들어봤다. 2014년 탈북한 장모(55)씨는 일용직 인력 시장의 분위기를 들려줬다. "탈북자든 중국인이든 일당은 똑같이 준다. 그런데 중국인에게 일 시킬 때는 좀 어렵게 대하던 한국인들이 탈북자에게는 막 대한다. 폐쇄적이고 낙후된 북한에서 왔다고 벌레처럼 취급한다. 이렇게 한두 번 당한 탈북자들은 누가 '어디 사람이냐'고 물으면 '중국사람'이라고 말한다."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장이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사인 규명을 촉구하며 장례를 거부해 이날은 정식 장례식이 아닌 추모행사로 치렀다.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장이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사인 규명을 촉구하며 장례를 거부해 이날은 정식 장례식이 아닌 추모행사로 치렀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박 전 의장은 "문재인 정권은 고인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박 전 의장은 "문재인 정권은 고인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 탈북한 박모(62)씨는 건설 현장의 실상을 전했다. "중국인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과거와 달리 한국인들은 중국인을 대놓고 무시하지 못하지만, 탈북자들을 함부로 업신여긴다.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남한 사람들은 겪어보지 못해 절대 모른다."
 조국(祖國)에 환멸을 느낀 박씨는 영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받았다. "목숨 걸고 온 탈북자들이 왜 한국을 떠나려고 하는지 아느냐"고 그가 되물었다. "같은 민족에게 천대받느니 차라리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천대받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눈에는 핏발과 노기가 서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도 자신이 탈북자란 사실을 숨긴다. 탈북 청소년들은 왕따당하지 않기 위해 탈북자 가정 출신이란 사실을 철저히 감춘다. '자유와 인권을 위한 탈북민연대' 김태희 대표의 전언이다. "정부 예산으로 탈북자 자녀와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방과 후 교육을 해주는데 탈북자 가정 아이들은 이 교육을 기피한다. 탈북자 자식이란 사실을 친구들이 알아챌까 봐 전전긍긍한다." 김 대표는 "한국 사회가 색깔론으로 탈북자를 바라보니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자꾸 벌어진다"고 개탄했다.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을 마친 탈북자들이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을 마친 탈북자들이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 참석한 탈북자들과 시민들이 21일 오후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면서 청와대 통일부 남북하나재단 서울시 관악구 관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세정 기자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 참석한 탈북자들과 시민들이 21일 오후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면서 청와대 통일부 남북하나재단 서울시 관악구 관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세정 기자

 문재인 정부 들어 탈북자를 남북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라 공공연히 매도하는 바람에 소외감과 고통을 더 느낀다고 탈북자들은 토로한다. 최정훈 북한인민해방전선 대표는 "국가정보원이 탈북자동지회에 매년 8500만원을 지원해오다 2018년 갑자기 중단했고 경찰청도 숭의동지회에 매년 1억3000만원을 지원하다 끊었다. 외부 강연 등 탈북자 인권단체들이 운영비를 마련할 숨구멍 같은 돈줄을 막고 네트워크를 끊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고급 북한 정보를 많이 캐온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소장이 간첩으로 몰려 구속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은 것을 비롯해 고영환·안찬일·강명도·김흥광·지성호·박상학·강철환 등 탈북 지식인들이 압박과 고초를 겪고 있다고 한다.  
 지난 21일 탈북자들과 이들의 아픔에 공감한 시민 등 수백명이 '아사 탈북 모자 시민 애도장'을 열었다.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장은 "애완동물도 살이 쪄서 다이어트하는 이 나라에서,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 정권에서 탈북 모자가 굶어 죽었다"며 울먹였다. 탈북자들은 대통령은 그 흔한 조화 한 송이 보내지 않았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연철 통일부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등 이 정부 사람은 단 한 명도 조문조차 하지 않았다며 성토했다.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을 주최한 탈북자들이 정부서울청사를 지나가면서 "통일부 해체"를 요구했다.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을 주최한 탈북자들이 정부서울청사를 지나가면서 "통일부 해체"를 요구했다.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 참석한 탈북자들이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란 붓글씨 밑에 혈서로 이름을 썼다. 일부 탈북자는 손에 출혈이 심해 응급 치료를 받기도 했다. 장세정 기자

'아사 탈북 모자 한성옥-김동진 시민 애도장'에 참석한 탈북자들이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란 붓글씨 밑에 혈서로 이름을 썼다. 일부 탈북자는 손에 출혈이 심해 응급 치료를 받기도 했다. 장세정 기자

 '탈북자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란 붓글씨 밑에 혈서로 이름을 쓴 탈북자들은 애국가를 목놓아 불렀다. 탈북 모자의 영정 사진을 들고 정부서울청사를 거쳐 청와대 앞으로 행진했다. 죄인처럼 웅크리고 지냈던 탈북자들이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주인처럼 활보했다.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대표는 "통일부를 해체하라"고 외쳤다.
 김태희 탈북민연대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호소했다. "도대체 우리 탈북자들이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사람이 먼저라더니 한성옥·김동진은 사람이 아닙니까. 애국 시민 여러분, 탈북민들의 아픔에 눈길 좀 주시고 우리 말에도 귀를 좀 기울여주십시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