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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장욱진 화백의 아내, 100년을 살아 보니…

중앙일보 2019.09.19 00:15 종합 27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1980년 봄 무렵이다. 화가 장욱진(1917~90)은 충북 충주 수안보 온천 인근 농가에 화실을 차렸다. 아내 이순경씨가 마련해준 것이다. 서울에서 서점을 꾸리며 가계를 책임졌던 아내는 함께 내려올 수 없었다. 남편도 홀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온천장에 밥집을 맞춰두었다. 그런데 며칠도 안 돼 밥집 사람이 SOS를 쳤다. 장 화백이 밥도 굶고 술만 마시니 당해낼 수 없다고 했다.
 

자유인 남편이 남긴 그림
순수·동심의 무차별 세상
생계 책임진 예술가 아내
열심히 살되 집착 끊어야

아내는 서점을 딸에게 맡기고 수안보로 내려갔다. 남편과 오랜만에 둘만의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남편의 주벽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작품이 잘 안 풀리면 상황이 더 심각했다. 아침에 “잠깐 30분만 있다 올게”하고 나간 남편은 밤 9시에야 택시기사에 업혀 돌아왔다. 아내는 산속 외딴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불경 『금강경』이 유일한 친구였다. 일독(一讀)에 40분 걸렸다. 칠독(七讀)을 하고 나면 하루해가 지곤 했다.
 
불경을 읽는다고 갑갑한 가슴이 뚫리진 않았다. 서울에 있는 법당 선생님께 전화를 자주 걸었다. 괴로운 마음에 남편 제자들에게도 하소연을 했다. 전화가 없었다면 아마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 한 달 전화비도 상당했다. 약 40년 전 일인데도 35만원이나 나왔다. 주변에서 궁금해했다. “혹시 공장 하십니까?” 예술에선 그 누구보다 철저했지만 일상에선 그 누구보다 어수룩했던 화가 남편을 둔 아내의 고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도인처럼 살다 간 장욱진 화백과 그를 뒷바라지한 이순경 여사. 올해 100세를 맞은 이 여사는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 박사의 맏딸이다. [중앙포토]

도인처럼 살다 간 장욱진 화백과 그를 뒷바라지한 이순경 여사. 올해 100세를 맞은 이 여사는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 박사의 맏딸이다. [중앙포토]

장욱진-. 20세기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다. 2년 전 그의 탄생 100년을 축하하는 전시회가 잇따라 열렸다. 내년이면 타계 30년이 되지만 그가 남긴 그림은 유통기한이 없다. 장 화백의 작품은 보는 이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킨다. 나무·새·소·가족·아이·해·달·산·집 등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사람이 정답게 어울리는 화폭 앞에 서면 세상사 걱정거리가 모두 부질없어 보인다. 작가 스스로 “나는 심플하다.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고 외쳤다.
 
그의 실제 삶도 그랬다. 격식과 계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돈 문제에 어두운 것은 물론이다. 술·담배 빼고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술을 즐겼기에 종종 실수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아내는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새벽에 눈을 뜨면 그 즉시 자리를 걷어찼다. 새벽 2시나 3시, 눈을 뜨자마자 화구를 챙겨 들었다. 눈 뜨고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자유인 장욱진은 ‘0점 남편’이었다. 살림은 100%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늘 집에서 도망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이 불쌍해 보였다. “갱년기니 뭐니 하나도 모르고 살았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고 돌아봤다.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낸 다음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궁핍한 생활이 싫어서 (생활) 일선에 튀어 나갔어. 남편 때문이 아니야. 진짜 남편을 위했다면 술 마실 때 같이 마시고, 같이 굶었어야 했는데….” 대단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장 화백이 불경을 외는 아내의 모습을 담은 ‘진진묘’. 33x24㎝.

장 화백이 불경을 외는 아내의 모습을 담은 ‘진진묘’. 33x24㎝.

아내는 고단한 일상을 믿음으로 버텼다.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장 화백은 그런 아내의 초상을 담은 명품도 남겼다. 1970년 정월 초에 그린 ‘진진묘(眞眞妙)’다. 진진묘는 아내의 불교 법명. 불경을 공부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1주일 동안 음식도 끊으며 작품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림을 마친 남편이 이후 몇 달간 앓아누웠다는 얘기도 있다. 이 그림은 5년 전 경매에서 6억2500만원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달 3일 100세 생일을 맞아 축하 케이크를 받고 있는 이순경 여사.

이달 3일 100세 생일을 맞아 축하 케이크를 받고 있는 이순경 여사.

 
이순경 여사가 이달 초 100세 생일을 맞았다. 남편과 아내, 양가 가족 70여 명이 모여 작은 잔치를 열었다. 단행본 『진진묘』도 앞서 출간됐다. 희생과 인내의 아내·어머니상이 펼쳐진다. 20세기 한국 여성사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남녀가 따로 없는 요즘 세상에 ‘딴 나라 얘기’ 같은 대목도 많지만 믿음과 신뢰의 부부·가족관계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난 한 달여 우리를 지치게 한 ‘조국 사태’ 때문일까. 거짓과 위선이 없는 글과 그림이 해독제처럼 느껴진다. 집착과 차별, 편가르기를 꾸짖는 『금강경』 소리도 들릴 듯하다. 이 여사가 자녀들에게 남긴 당부는 이렇다. “아버지가 평소 집착하지 말라, 모든 걸 떨어버리고 살자고 하셨다. 내가 백 년을 살았지. 늘 기도해라, 그 길밖에 없지….”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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