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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이번 한국 경제 위기가 훨씬 불길한 네 가지 이유

중앙일보 2019.09.19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문 대통령 “경제 성공”의 허와 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우리 경제가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2년 동안 일자리 정책을 줄기차게 펼쳐 고용상황이 양과 질 모두에서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우리 사회의 염장을 지른 셈이 되고 말았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보면 가계·기업 등 주요 경제 주체들이 고통에 짓눌려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경제분석기관들도 압도적으로 한국 경제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복합골절에다 일본화 위험
해외 특수마저 기대 어려워
위기의식 자발적 무장해제
해법 실행할 용기도 안 보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6개월 연속 “대내외 수요가 위축되면서 전반적으로 경제상황이 부진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서 수요는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비, 그리고 수출을 말한다. 수출은 이미 반도체와 석유류를 중심으로 9개월 연속 전년 대비 마이너스 행진 중이다. 설비투자 역시 올 들어 4.7% 감소했다. 여기에다 소비자심리지수(CSI)까지 92.5(8월)로 얼어붙으면서 가계소비마저 위축될 조짐이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평균은 2.5%(1분기)→2.2%(2분기)→2%(3분기)로 3개월마다 곤두박질하고 있다. 성장·소비·투자·수출 등 어디 한 곳 성한 게 없다. <그래픽 1 참조> 온 사방에 불길한 징조다.
 
전방위로 수축되는 한국 경제

전방위로 수축되는 한국 경제

특히 지난달 소비자 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0.04% 하락하면서 긴장감은 높아졌다. 1965년 이후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정부는 “저유가와 농산물 출하 증가 등 공급 요인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수요 부진으로 유발되는 디플레이션 상황이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저성장과 저물가가 ‘뉴노멀’이 되고 있다. 한국 경제라고 예외일 수 없다. 더구나 한국은 미·중 무역분쟁, 일본 수출규제라는 초대형 악재의 한복판에 노출돼 있다.
 
어느새 ‘R(리세션·경기침체)의 공포’ ‘D(디플레이션·물가하락)의 공포’가 보통명사로 굳어지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비상대책(컨틴전시 플랜)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런 위기감에 따른 조치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경제 위기가 과거에 비해 네 가지 이유에서 훨씬 위험한 조짐”이라고 입을 모은다.
  
① 만성 무기력증+복합골절
 
이번 저성장과 저물가는 단순한 경기 순환 사이클에 따른 조정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 고령화와 생산 인구 감소, 글로벌 공급과잉, 사상 최대의 가계·정부 부채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 성장판이 닫히면서 만성 무기력증을 앓기 시작했다. 길게 보면 60년 가까이 줄곧 팽창해온 한국 경제가 사상 처음 수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과거 경제 위기들이 외부 충격에 따른 타박상이었다면 이번에는 내부에서 일어난 복합골절까지 겹쳤다. 저성장, 투자 감소, 소비 위축 등 전반적인 경제 에너지가 고갈되는 분위기다. 정부가 사상 최대의 재정을 퍼붓는 상황에서 이런 전방위적 수축이 일어났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 ‘일본화(Japanization)’에 전염된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20년 격차를 두고 일본의 경제성장률 급락과 급속한 고령화를 닮아가고 있다. <그래픽 2 참조>
 
일본 닮아가는 한국

일본 닮아가는 한국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저성장·저금리·저물가의 ‘3중고’에 짓눌렸다. 저성장보다 더 무시무시한 게 저물가의 공포다. 물가가 떨어지면 투자를 해도 이익이 남지 않으니 아무리 금리가 낮아도 돈을 빌려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니 투자 부진→기업 실적 감소→임금 감소→가계소비 위축→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일본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일단 3저(低)의 늪에 갇혀버리면 백약이 무효다. 정부가 아무리 단기 경기부양책을 퍼부어도 약발이 듣지 않는다.
  
② 기댈 언덕 사라진 외톨이 신세
 
1997년 외환 위기 때는 미국, 일본, 유럽, 중국 경제가 탄탄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사실 금 모으기 운동은 내부 이벤트였을 뿐이다. 한국이 2년 만에 외환 위기에서 탈출한 진짜 원동력은 원화 환율이 폭등하면서 대미·대중·대유럽 수출이 급증한 덕분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다. 미국 경제가 휘청대고 유럽은 재정 위기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중국이 중앙정부의 4조 위안(800조원), 지방정부까지 합해 무려 18조 위안(3600조원)을 퍼붓는 초대형 경기부양책으로 버텨준 게 결정적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을 자랑하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특수에 힘입어 한국 경제는 글로벌 금융 위기를 여유 있게 넘길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기댈 언덕을 찾기 어렵다. 전 세계 경제가 비틀거리거나 시들해 지고 있다. 미국과 통상 마찰 중인 중국은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더 이상 6%대의 고속 성장을 지속하기 쉽지 않다”고 공식 인정했다. 폴 크루그먼 미 뉴욕시립대 교수는 “미·중 분쟁이 심화하면 중국 경제가 위기를 맞는 티핑 포인트가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유럽 경제도 프랑스만 반짝 호황을 누릴 뿐 브렉시트를 앞두고 잔뜩 위축돼 있다. 미국 역시 완전고용에 따른 임금상승→가계 소득 증가→소비 증가→고성장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지는 조짐이다. 여기에다 장단기 금리 역전으로 경기 침체까지 예고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미 연준(FRB)을 향해 “기준 금리를 1% 인하하라”며 “내겐 파월 FRB 의장을 해임할 권한이 있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는다.
 
보호무역이 기승을 부리면서 글로벌 경제의 기둥이던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은 기능부전에 빠져 버렸다. 환율전쟁도 불붙을 조짐이다. 이렇게 각자도생의 정글로 변할수록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현실적 접근으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도 “다시는 지지 않겠다”며 일본과 전면적 통상전쟁에 들어갔다.
  
③ 거꾸로 가는 정부
 
문 대통령은 2년 넘게 소득주도 성장과 근로시간 단축, 탈원전 등 반시장·반기업 정책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소득주도 성장은 양극화 심화와 일자리 감소라는 부작용만 낳았고, 여기에다 혁신성장과 규제완화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서 한국 경제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경제 체질 전환 과정의 진통” “우리 경제는 전체적으로 성공으로 가고 있다” “가짜 뉴스로 시장 불안 키우지 말라”며 꿈쩍도 않고 있다. 경제 실패를 홍보 실패에서 찾는 분위기도 있다.
 
문 대통령이 마지막이자 유일한 수단으로 믿는 것은 재정이다. 초수퍼 예산으로 재정 투입을 남발하고 있다. 하지만 재정지출 효과는 급감하고 있다. 국회예산처는 재정 투입을 1조원 확대할 때 국내총생산(GDP)이 늘어나는 규모가 2014년 8000억원에서 2017년에는 5600억원으로 감소했다고 경고한다. 취업자 증가수도 30%가량 줄어들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과거에는 재정을 투입하면 그 돈이 내수 시장에서 돌았지만 개방도가 높아지면서 상당 부분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본도 잃어버린 20년 동안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은 외면한 채 재정 투입이라는 단기 땜질정책만 남발하다 실패했다.
  
④ 해법은 나와 있는데 실행이 어려워
 
문 대통령은 “8월 고용률이 최고”라고 자랑했지만 늘어난 취업자 45만명 가운데 60세 이상의 노인이 39만명이다. 세금으로 노인들 알바만 양산한 것이다. 고용이 최악이었던 작년 8월의 기저 효과에 따른 착시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김광두 서강대 명예교수는 “정부가 통계를 선별적으로 이용해서 대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는 것은 지능적 사기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위기의식만 있으면 경제 위기는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정부는 스스로 위기의식을 무장해제시키려는 게 문제다. 이제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봐야 한다. 정책 당국이 한번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나중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손 쓸 방도가 없다.
 
경제 위기에 대처할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KDI와 한국은행은 보고서를 통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려면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해야 한다”며 “각종 규제와 진입장벽을 완화하고, 노동 개혁과 선제적인 구조조정으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 경제학회는 “반시장·반기업 정책들부터 획기적으로 전환하고 시장과 자유경쟁을 믿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쉬운 해법들이지만 실행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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