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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도 아닌데 명절스트레스? 미혼자는 없을 줄 알았는데...

중앙일보 2019.09.18 15:00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3)

하늘의 보름달처럼 위장이 커지는 추석이다. 연휴 내내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을 먹어댄다. [중앙포토]

하늘의 보름달처럼 위장이 커지는 추석이다. 연휴 내내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을 먹어댄다. [중앙포토]

 
하늘에 뜬 둥근 달처럼 위장이 커지는 날, 추석이다. 연휴 내내 기름진 밥에 고기에 나물에 송편과 각종 전을 줄기차게 먹어댄다. 부모님 모두 막둥이로 태어난 덕에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큰 집, 외갓집을 두루 다니며 그저 배불리 먹기만 하면 되었다.
 
명절 당일 큰아버지 댁에 가면 ‘새언니들’(큰아버지의 며느리들)은 전날부터 와서 추운 부엌에서 허리가 꺾어지라 일해도 ‘아가씨’인 우리는 아랫목에서 윷놀이하며 깔깔댔다. 재미로 만두라도 빚을라치면 “아서요 아기씨, 저희가 빚어야 삶아도 안 터져요.”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뿐인가. 외갓집에 가면 여자들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외삼촌과 오빠들 덕에 밥상에 숟가락만 놓아도 (역시 외삼촌의 며느리들인) 언니들이 설거지해 놓은 그릇의 물기만 닦아도 “손이 야무지다” 칭찬받았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굴레는 여지없이 곱게 자란 ‘딸’들을 ‘며느리’라는 거친 운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는 그 불행을 일찍이 예감하고 본인 품에 있는 동안만큼은 부엌일을 안 시키셨다. 설거지를 도우려 하면 “시집가면 원 없이 한다.”며 손에 물도 못 묻히게 하셨고, 당신은 밤새도록 산더미 같이 쌓인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면서도 “이다음에 시집가면 이런 거 절대 하지 마라” 당부했다.
 
아버지가 직장에 계신 동안 딸 넷 중 둘은 시집보내야 한다는 목표에 따라 큰 언니와 둘째 언니는 학업을 마치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셋째 언니도 서른 넘어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결혼’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딸을 셋이나 떠나보낸 부모님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 가슴 아픈 사건들도 언젠가 소개될 날이 있으리라) 나이 찼다고 서둘러 결혼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시집보낸 후 어떤 난관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지,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을 절절히 느낀 덕에 막내인 나는 열외가 되었다. 덕분에 난 여느 여인들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를 체험할 기회가 없었다.
 
너무 잘, 운 좋게 지나왔던 탓일까? 아버지와 둘이 살며 전혀 다른 차원의 명절 스트레스가 생겼다. 연휴가 전혀 반갑지 않고, 연휴가 길면 길수록 더 깊어지는 고민, 바로 ‘이번 연휴는 또 아버지와 뭘 하며 보내나?’ 하는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변화였다. 집에 아들이 없으니 이런 때 아쉽구나! 처음으로 실감했다.
 
명절의 TV에서는 도란도란한 가족들이 나오고, 그걸 보시는 아버지는 두 배로 외로워하셨다. 사진은 한상윤 작가의 작품 ‘행복한 대가족’(2017)' [사진 한상윤]

명절의 TV에서는 도란도란한 가족들이 나오고, 그걸 보시는 아버지는 두 배로 외로워하셨다. 사진은 한상윤 작가의 작품 ‘행복한 대가족’(2017)' [사진 한상윤]

 
TV만 켜도 도란도란 둘러앉은 가족들이 나오는 명절, 아버진 두 배로 침울해 지고 두 배로 외로워하셨다. 엄마 살아 계실 땐 부모님은 큰댁에 가셔도 나는 일 있다고 출근하거나 집에서 밀린 잠을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적금을 깨 여행을 가기도 했다. 시집간 언니들이 오면 오는 대로 반갑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편했다. 연휴 일정은 온전히 나의 의지, 자유였다. 그런데 아버지와 단둘이 남으니 연휴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게다가 엄마를 모신 곳에서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합동 추모예배를 드리게 되어 우리 가족이 모이는 날은 자연스럽게 추모예배일로 정해졌다. 교통체증이 심한 설, 추석 때 지방에 사는 언니들더러 오라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 되어버렸다.
 
언니들 역시 엄마 없는 친정에 오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듯했다. 처음 몇 년은 아버지와 둘이 놀러 다녔다. 여행도 가고 기도원도 가고 심지어 단식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봤지만, “남들은 명절 때 외국에 있다가도 돌아오는데, 비싼 돈 들여가며 왜 밖을 떠도느냐”며 더 서글퍼 하셨다. 연휴 아니면 언제 가느냐고 달래가며 다니는 것에 지친 나는 급기야 언니들에게 폭탄선언을 하고 말았다.
 
“언니, 아버지와 다녀보니,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야. 걷는 것도 힘들어하시고, 오르막이나 계단이 있으면 아예 포기하는 때가 많으셔. 엄마 살아계실 때 함께 여행 가지 못한 거 후회했었지? 아버지도 언제까지 우리 곁에 계시진 않으니,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여행을 계획해 주면 좋겠어. 설, 추석 명절도 좋고, 공휴일에 짧게 라도 좋으니 셋이서 돌아가면서 1년에 한 번 정도는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거나 여행을 계획해 줘. 그 기회에 나도 휴가 좀 가자!”
 
어쩌면 아픈 곳을 정곡으로 찌른 것인데, 언니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시어른 모시랴, 자녀들 키우랴, 직장생활 하랴 나보다 더 힘들 수 있는데 괜한 투정 부렸나 후회도 했지만, 속마음 보여주고 나니 시원했다. 언니들도 그간 느꼈던 감정, 말 못한 사정들을 꺼내놓아 서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딱히 달라진 것은 없다. 거창한 여행 계획도 없었다. 지난 여름휴가 때 큰 언니 집에서 아버지와 하룻밤 지내고 왔고, 아버지 혼자 둘째 언니가 사는 강릉에 다녀오시기도 했다. 내년 여름엔 비록 하룻밤일지라도 부산에서 한번 모여보기로 했다.
 
이번 추석 연휴엔 첫날은 아버지와 둘이 영화 ‘타짜 2’를 관람했고, 추석 당일엔 큰 언니네가 잠시 다녀갔다. 아버진 시댁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들른 게 불편하셨는지“사돈어른 건강도 안 좋으시고 나보다 아홉 살이나 많으신데 도리가 아니다. 얼른 가거라.” 하셨지만 속으론 반가우신 듯했다.
 
버스 안 할아버지를 향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손주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지난여름, 아버지 혼자 강릉 언니 집에 다녀오셨다. [사진 푸르미]

버스 안 할아버지를 향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손주들. 어머니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지난여름, 아버지 혼자 강릉 언니 집에 다녀오셨다. [사진 푸르미]

 
모두 한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지만, 그때그때 상의해서 형편 따라 엄마의 빈자리를 메꾼다. 강릉 가는 도로도 좋아졌고 KTX 타면 충청도는 1시간, 부산도 3시간 이내 가능하니 나도 도움이 필요할 땐 눈 질끈 감고 언니들에게 전화한다.
 
그렇게 아버지와 난 명절 연휴 외로움에 익숙해져 간다. 가족의 소중함을 절감하며 맘껏 그리워하는 시간으로 삼고 이겨내는 중이다.
 
아버지와 둘이 남은 뒤 느낀 충격 중 하나가 ‘우리 가족’의 범위가 ‘시집 안 간 나’와 ‘시집간 언니들’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그 차이도 담담히 받아들인다. 위기 때 고무줄같이 탱탱하게 당기려면 평소엔 어쩔 수 없이‘느슨해지는 것’도 용납해야 한다. 끌어당기는 것보다 여유 있게 줄을 내주기가 쉽다. 그편이 상처도 없고 마음이 편하다. 나도, 다른 가족도. 어쩌면 이런 이해와 배려가 우리 가족을 더 단단하게 만들리라 기대하면서.
 
푸르미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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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 푸르미 공무원 필진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 아버지와 10년째 동거 중인 20년 차 공무원. 26년간 암 투병 끝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했다. 팔순을 넘어서며 체력과 인지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아버지를 보며 ‘이 평화로운 동거가 언젠가 깨지겠지’ 하는 불안을 느낀다. 그 마음은 감춘 채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버지에게 얹혀살고 있다”고 주변에 이야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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