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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제 딸이 영어를 잘해서”가 불편한 이유

중앙일보 2019.09.18 00:10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수진 국제외교안보팀 차장대우

전수진 국제외교안보팀 차장대우

영어는 권력이다.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자이르 보우소나르 브라질 대통령이 35세 친아들을 주미대사로 지명하면서 든 이유 중 하나가 “내 아들이 영어를 잘해서”다. 북한 외교의 간판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주무기도 영어다. 그의 연설 영상을 보면 혀는 배배 꼬지 않아도 적확한 표현이 빼어나다. 둘 다 외국어 습득에 결정적 시기인 10대 초반에 유학 혜택을 누렸다. 역시 유학파인 대한민국 외교의 두 얼굴은 싸움까지 영어로 하신단다. “잘났군 잘났어”는 댓글엔 부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교육열 유난한 한국에서 영어는 이제 계급이다. 그런데, 좀 특이한 계급이다. 내가 직접 다는 건 어려운데, 돈이나 운이 있으면 내 자식에겐 얼마든지 달아줄 수가 있다. 일단 영어 카스트에서 상위에 올라만 가면 남들 주눅 들게 하는 버터 향 폴폴 영어 발음 장착은 기본이요, 대학 입시에서도 혜택의 고속도로가 뚫린다. 개천에서 다른 용은 몰라도 영어의 용만큼은 될 수 있다.
 
노트북을 열며 9/18

노트북을 열며 9/18

어린 시절 해외 생활 적응은 물론 힘들다. 하지만 영어 계급장만 달 수 있다면 고난의 행군을 마다할 이, 한국에 몇이나 될까. 계급장 달 기회를 못 누린 5170만명 대다수는 속만 쓰릴뿐. 더 아픈 건 누린 자들이 보이는 부지불식간의 둔감함이다. 기자가 소위 ‘토종’으로 영어신문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는 말을 듣자 수년 전 모 외교부 장관이 “내 (해외파) 아이들 보니 토종은 역시 한계가 있더라고”라고 한 말도 잊히지 않는다.
 
조국 법무부 장관도 그랬다. 기자회견·인사청문회에서 조 장관은 “제 딸 아이가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자신의 유학으로 인한 어부지리 특권인 따님의 영어 계급장을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닌가.  
 
따님은 억울할 순 있겠다. 영어 계급장은 자기 결정권이나 노력이 아니라 아버지 덕에 어쩌다 덜컥 단 것 뿐이니까. 하지만 변치 않는 건 조 장관 가족이 그 계급장을 만끽을 넘어 남용했다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염치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그래서인가,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이 신선하다. 명실상부 ‘영국 남자’인 그는 최근 출시한 명상앱 ‘코끼리’를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에서 한국어 발표를 자청했다. “미친 듯이 긴장했다”고 털어놨지만 10분간의 발표는 멋졌다. 노력으로 쟁취한 튜더의 한국어가, 아빠 덕 유학으로 어쩌다 잘하는 조 장관 따님 영어보다 박수받아 마땅하다. 영어 잘하니까 그냥 이해하라는 말은 아무래도 영 불편하다.
 
전수진 국제외교안보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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