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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핵 균형을 통한 한반도 평화

중앙일보 2019.09.17 00:18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추석 연휴에 10부작으로 된 다큐멘터리 영화 ‘베트남 전쟁’을 봤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겸 제작자인 켄 번즈가 2017년 텔레비전으로 방영한 대작이다. 영화를 통해 새삼 확인한 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自助)’의 진리다. 남이 아무리 도와줘도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자주국방의 결기 없이는 나라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외세에 국가안보를 의존한다는 게 얼마나 허망하고 위험한 것인지도 절감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승리가 무망(無望)해지자 남베트남의 패망이 훤히 예상됨에도 항복문서나 다름없는 평화협정에 도장을 찍고 서둘러 베트남에서 빠져나갔다.
 

한·일 핵무장 가능성 언급한
비건 대표의 주목할 만한 발언
비핵화 협상 실패에 대비해
독자 핵무장 카드 검토 나설 때

당시 한국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강대국도 국가와 정권의 이익 앞에서는 언제든지 동맹국을 배신할 수 있다는 걸 똑똑히 지켜봤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한 비책(秘策)으로 은밀히 핵무장을 추진한 배경일 것이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나서기 전인 데다 주한미군이 수백 개의 전술핵을 보유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무모한 시도였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북한은 수십 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됐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미국의 핵우산뿐이지만, 제대로 펴질지 의문이다. 동맹을 자산보다 부채로 여기며 부담을 떠넘길 궁리만 하는 도널드 트럼프는 북한이 아무리 미사일을 쏘아대도 단거리이기 때문에 괜찮다며 수수방관하고 있다. 북한이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 확실해지면 미국이 로스앤젤레스를 포기해가며 서울을 지킬 것으로 기대하기 힘들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국의 지도자라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스티븐 비건 미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발언이다. 그는 지난 7일 공개강연에서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했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실패하면 한국과 일본도 핵무장에 나서는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헨리 키신저 박사의 말을 인용한 발언이긴 하지만, 이를 단순히 북한과 중국에 대한 경고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한국과 일본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핵무장 카드를 고려하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적 추론의 결과 아닐까.
 
이론과 실무에서 미 최고의 핵 전략가로 꼽히는 찰스 퍼거슨 미 과학자연맹(FAS) 회장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응한 한국의 핵무장 시나리오를 담은 보고서를 2015년 발표했다. 이른바 ‘퍼거슨 보고서’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한국이 짧게는 6~8개월 내 핵무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월성 원자로에 저장된 사용후핵연료만 재처리해도 4430개의 히로시마 급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계산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이란 장애물은 NPT 10조에 규정된 탈퇴 사유인 ‘국가의 지상(至上) 이익 침해’를 근거로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핵실험 후 1년 만에 제재가 해제된 인도의 사례를 들며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의 핵무장은 북한과 다르다는 지적도 했다.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과 교역을 중단하면 다른 나라들도 피해가 크기 때문에 함부로 경제제재를 하기 어렵다는 말도 했다. 요컨대 미국만 용인하면 한국의 핵무장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비핵화 협상을 외교 치적으로 삼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완전히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외교적 전시 효과를 노려 지금은 ‘밀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트럼프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다. 군사적 옵션은 선택지가 아니다. 피해가 너무 큰 데다, 북한 전역에 은닉된 핵무기와 핵시설을 다 찾아내 없앨 수도 없다. 남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허용해 북한 핵을 무력화하는 방법뿐이다. 대선 후보 시절 트럼프는 미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선의’에 의지하는 순진한 지도자가 아니라면 비핵화 협상의 실패에도 대비해야 한다. 다음 주 뉴욕에서 있을 트럼프와의 회담은 그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기대하지만, 협상 실패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무망한 것으로 판명 나면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함으로써 핵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길일 수 있다. 냉전 이후 입증된 ‘상호 핵 공포’의 역설이다. 핵 균형을 통해 군사적 대치와 경쟁을 끝내면 평화경제를 위한 남북 경제협력도 급진전할 수 있다. 군사비 부담이 줄어 미국의 안보이익에도 기여할 것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우리도 핵 개발을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지금부터 핵무장을 위한 군사적, 외교적, 기술적, 국제법적, 경제적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자주국방에 실패해 패망한 남베트남의 전철을 밟지 않는 길이고,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운명을 타개하는 길이다. 언제까지 핵에 발목이 잡혀 북한과 외세에 끌려다니며 살 것인가.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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