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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성과 괴물의 양면… 성공이 권력을 남용하게 만들었다"

중앙일보 2019.09.16 10:58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로 이름 날리던 시절 기네스 팰트로(왼쪽), 카메론 디아즈(오른쪽)와 함께 자리한 하비 와인스타인. 와인스타인 스캔들이 불거진 후 이들도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로 이름 날리던 시절 기네스 팰트로(왼쪽), 카메론 디아즈(오른쪽)와 함께 자리한 하비 와인스타인. 와인스타인 스캔들이 불거진 후 이들도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2년 전인 2017년 10월 미 뉴욕타임스(NYT)와 주간지 뉴요커가 동시에 ‘와인스타인 성추문’을 터뜨렸을 때, 한국까지 그 파고에 휩싸이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여러 정치‧법조‧문화계 권력자들을 줄줄이 낙마‧퇴출‧구속시켰다. 그래도 남는 의문. 어쩌다 그들은 권력을 남용했고 피해 여성들은 왜 침묵했던 걸까.  

할리우드 미투 스캔들 해부한 다큐
'와인스타인' 감독 맥팔레인 인터뷰
"남녀 관계 미래 위해 진실을 재구성"

 
오는 26일 국내 개봉하는 ‘와인스타인’(원제 Untouchable)은 이런 질문에 답하는 다큐멘터리다. 영국 공영방송 BBC가 제작한 영화는 지난 30년간 할리우드를 쥐락펴락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67)의 성공과 몰락 전후를 촘촘히 다룬다. 특히 그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배우‧여직원들이 직접 카메라 앞에서 육성 증언을 한다. 소송이 아직 진행 중인데다 와인스타인이 할리우드 재기를 장담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담한 작업이다.  
 

다수 독립영화로 할리우드 혁신 이끈 천재

“이들은 각자 경험을 털어놓고 세계에 퍼뜨림으로써 다른 이들을 감화시키고 행동을 이끌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꺼이 입을 열었어요. 어떤 식이든 괴롭힘과 학대, 혹은 권력 남용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개인적으로도 이 사건이 크게 다가온 이유죠.”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와인스타인'을 연출한 우르술라 맥팔레인 감독.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와인스타인'을 연출한 우르술라 맥팔레인 감독.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다수의 웰메이드 다큐멘터리로 영국 아카데미상에 네 차례 노미네이트된 여성감독 우르술라 맥팔레인은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와인스타인 ’연출 동기를 이렇게 전했다. 남성과 여성 관계의 앞날 혹은 권력자와 약자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그는 한쪽이 아닌 전체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600여명의 인터뷰 후보자 목록을 만들고 400명과 접촉했다. 128명이 대화에 응했지만 대다수는 비공개를 원했다. 영화는 최종적으로 29명의 증언을 퍼즐로 맞추면서 ‘와인스타인이란 거물 혹은 괴물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추적한다.
 
“그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그게 가능했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했어요. 그는 독립영화계에서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성공'이 궁극적으로 그가 권력을 남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요. 만약 그가 괴물로 분류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돼 그저 일회성 사건으로 치부되겠지만, 와인스타인 역시 한때는 어린애였답니다.”
 
실제로 영화는 그가 제작자로서 거둔 성취를 있는 그대로 조명한다. 와인스타인 형제가 설립한 미라맥스는 1980년대 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나의 왼발‘ ‘시네마 천국’ 등을 내놓으면서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쥐었고 독립영화를 주류 산업계로 편입시켰다. “미라맥스는 에너지가 넘쳤고 일반 상식을 깨는 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존 슈미트 미라맥스 최고재무책임자) “그와 함께 있으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젤다 퍼킨스, 미라맥스 런던 직원) 등의 고백이 이어진다. 93년 미라맥스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 인수되고 히트작이 이어지면서 와인스타인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미투 스캔들로 추락한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오른쪽)이 1980년대 말 동생 밥 와인스타인과 함께 '미라맥스'를 설립하고 활동할 당시 모습.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미투 스캔들로 추락한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오른쪽)이 1980년대 말 동생 밥 와인스타인과 함께 '미라맥스'를 설립하고 활동할 당시 모습.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2000년 미라맥스 대표 시절 뉴욕 허드슨 호텔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 여사의 생일 파티에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는 하비 와인스타인.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2000년 미라맥스 대표 시절 뉴욕 허드슨 호텔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 여사의 생일 파티에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는 하비 와인스타인.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동시에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할리우드 입문 초기에 와인스타인을 맞닥뜨렸던 이들은 그를 통해야만 경력이 쌓이는 ‘권력의 마수’를 실감했다. 영화는 이들이 강압에 못 이겼을 뿐 아니라 손해가 염려돼 심적 갈등을 겪은 것도 보여준다. “그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들은 언급할 필요 없다고 주지시켰음에도 하나같이 용감했다”고 감독은 전했다.
 

경력 쌓기 원한 여성들 '꿈과 희망' 착취 

이렇게 해서 ‘펄프 픽션’의 로잔나 아퀘트, 모델 겸 배우인 파즈 드 라 휴에타 등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놓는다. 놀랍게도 교차 편집된 고백담은 판에 박은 듯 비슷하다. 에리카 로즌바움이 NYT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성들이 당한 건데 마치 내 얘기 같았다. 호텔방에서 약속을 잡고 알몸으로 마사지를 요구하고…”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되풀이되는 사건들을 드러내고자 한 편집”(맥팔레인 감독)이 돋보인다.
 
그런데 올 초 선댄스 영화제 때 하필 이 장면에서 극장 불이 켜졌다 꺼졌다 반복했다고 한다. 관객들은 “하비가 무슨 짓을 한 것 아니냐”고 수군댔다. 우스갯소리라 해도 여전히 강력한 ‘와인스타인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다.  
 
“실은 이 다큐를 갖고 선댄스에 갈 때 압박감을 심하게 느꼈어요. 하비가 오랫동안 지배해온 곳이니까요. 아마 참석자 중엔 (다큐에서 고발하는)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한 이들도 많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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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여러 남성들도 등장한다. “당시 무언가를 의심하고 목격했지만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때문에 영화에 참여하는 게 ‘속죄’이자 카타르시스였을 사람들”(맥팔레인 감독)이다. 침묵한 이유도 털어놓는다. “배우들이 경력을 쌓으려고 하비와 잠자리를 갖는다는 소문을 들었다”(미라맥스 개발부 출신 잭 레흐너) 등이다. 언제나 가십의 주체는 여배우들이지 와인스타인이 아니었다. 그가 신진들의 ‘꿈과 희망’을 유린하며 수십년간 군림할 수 있던 이유다.  
 
스캔들 직후 와인스타인은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와인스타인 컴퍼니’는 파산 절차를 거쳐 현재는 랜턴 캐피털이라는 투자사에 넘어간 상태다. 할리우드는 와인스타인 사태 이후 전미 배우‧방송인 노조(SAG-AFTRA) 등을 중심으로 작업 관행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고 맥팔레인 감독은 강조했다.
 

"일상의 괴롭힘·학대 세상으로 끄집어내야"

“넓은 의미에서 #미투 운동은 할리우드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에게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산업의 변화를 요구하도록 했죠. 이 다큐를 본 분들이 일상의 괴롭힘과 학대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으면 해요. 그럴수록 처벌을 모면하는 피의자들이 적어질 겁니다.”
2018년 5월 25일 다수의 성폭력 혐의로 고소돼 뉴욕 경찰청에 소환된 하비 와인스타인.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2018년 5월 25일 다수의 성폭력 혐의로 고소돼 뉴욕 경찰청에 소환된 하비 와인스타인. [사진 스톰픽쳐스코리아]

 
한국에서 안 전 지사를 비롯해 이윤택‧고은 같은 이들이 퇴출된 데 대해선 “알지 못했다”면서 이 같은 답변을 덧붙였다.  
 
“많은 이들이 고발된 후 몰락한 것은 확연해요. 그렇다면 ‘그들의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을 중단해야 할까요. 어려운 질문이죠. 다만 그들이 유죄로 밝혀진다면 정치 역할을 맡거나 상을 받아선 안 돼요. 영화에서 마크 길이 말했듯, 천재성과 약자 괴롭힘(bullying)은 한 사람의 양면이고 그게 비극이죠.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들여다보며 권력구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해요.”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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