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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고향의 시간

중앙일보 2019.09.16 00:06 종합 31면 지면보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추석 달빛은 공평하지 않았다. 남쪽엔 구름이 달을 가렸고, 북쪽엔 둥근 달이 모습을 보이다 밤안개에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한반도 산천을 맴돌던 늦장마 잔운이 시시때때로 가을비를 뿌리기도 했다. 고향의 시간이 그랬을 것이다. 귀성객도, 그들을 맞는 촌민도 공평하게 내리는 달빛에 젖어 시름을 달래고 싶었지만, 여름내 진행된 마음의 균열은 치유되지 않았다. 아니 치유되기를 은연중 바랐던 고향의 시간은 날 선 논리와 치기와 하소연으로 엉망이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유년기와 청년기의 기억을 떠올려 찬찬히 곱씹어 본 것은 고향이 준 당연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추석 민심, 시대의 불화로 어수선
도덕이 고갈된 진보의 무딘 칼날
참여정부의 유훈 완수할지 의문
촛불시민이 청·검 일합 견제해야

부모가 태어나 가꾼 곳, 조상이 묻힌 곳에 서면 자신의 인생 이력을, 짧지 않은 여정에 굽이 서린 굴곡을 돌아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산굽이를 돌아드는 가을강(江)은 애잔하고, 툇마루에서 보이는 산등성이는 여전히 듬직했다. 그래도 ‘옅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추석의 밤은 왜 그리 아린지 헤아리긴 어렵다. 초로의 어머니 품에 안겨 달콤한 잠에 떨어진 아이들에게도 이 시대의 균열이 덮칠까. 이런 우려가 부질없다는 생각에 미칠 즈음 불쑥 얼굴을 내민 추석 달에 불확실한 미래를 무작정 맡겨보자는 낙관을 허용한 고향의 시간은 어쨌든 흐뭇했지만 시대의 불화를 치유하지는 못했던 거다.
 
그런 심정은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달 내 들끓었던 소용돌이를 대통령은 균열 그 자체로 봉합했다. 정권의 신조와 민심이 어긋났음에도 ‘불법은 없었다’는 궁색한 논리를 동원해야 했던 이유, 만신창이가 된 장수에 갑옷을 입혀 기어이 전장에 투입한 이유는 그의 ‘정치적 고향’이 끊임없이 발한 쓰디쓴 경고에 새겨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대검 중수부에 소환된 2009년 4월 30일 아침의 치욕을 잊을 수 없던 거였다. 검찰 개혁은 참여정부의 최대 과제였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공수처 신설로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을 견제하려던 정권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측근들이 외려 포토라인에 서야 했던 검란(檢亂)과 그에 대한 ‘항변의 죽음’을 이제는 끝장내야 한다는 비문(碑文) 말이다.
 
그 비문은 문 대통령의 ‘운명’이다. 노무현의 유서가 귀향객 문재인을 결국 정치로 끌어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문재인의 운명』). 어쨌든 ‘검찰 개혁 완수보고서’를 봉하마을 추모비에 헌정해야 하는 문 대통령의 ‘운명’에 견주면, 지난여름 폭풍처럼 몰아친 시대 균열과 진영 충돌이 빚어내는 불협화는 감내해야 할 정치적 비용인 것이다. 마치 박근혜의 궁중정치가 초래한 혼란의 비용을 온 국민이 치러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법무장관 조국의 ‘고향의 시간’은 어땠을까. 그가 날린 정의로운 멘트와 현실 자화상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에 괴로워했을까. 난생처음 치열하게 겪은 균열의 시간을 무엇으로 봉합했을까. 그의 저서 『진보집권플랜』(2010)에서 강조한 도덕적 언사와 ‘평등, 공정, 정의’의 레토릭이 자기검열을 거치지 않은 것임이 판명될 때 지식인은 위선의 집에 연금된다. 위선은 법적 다툼의 대상이 아니다. 진보의 상징 조국은 도덕에서 물러나 법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 다녔다. ‘불법은 없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사람 사는 세상’(노무현)과 ‘사람이 먼저다’(문재인)는 진보의 계율을 위반했다. 진보의 자산, 양심의 배반이다.
 
이 장면이 우리의 젊은 세대를 좌절의 늪에 빠뜨렸다. 세습자본주의의 농장에는 진보와 보수가 다를 바 없다는 누추한 현실, ‘뉴리치, 뉴하이’의 이너 써클엔 강력한 문화자본이 작동한다는 현실 말이다. 그럼에도 검찰 개혁이 물 건너간 것은 아니다. 검찰 개혁은 한국 정치의 오랜 숙원이자 뉴하이와 뉴리치의 공정성 감시의 핵심 요건이다. 10년 전, 검찰의 독립과 중립을 향한 시도는 야당의 조직적 저항과 거부권에 막혔다. 검찰도 국회와의 전방위 로비로 방어벽을 쳤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조국 장관은 요 며칠 민첩하게 움직였다. 민주당도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여론의 무차별 공세로 탕진된 도덕적 자원을 조 장관이 어디선가 수유하지 못하면 ‘문재인의 운명’은 또 그렇게 되풀이될지 모른다.
 
열쇠를 쥔 쪽은 외려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청문회 폐회 직전 전광석화처럼 행한 수사권 발동에 문 대통령이 대로했다는 후문에도 불구하고 조 장관 임명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데에 성공했다. 청·검(靑·檢) 일합에서 윤 총장이 발휘할 검법(劍法)이 ‘운명’을 좌우하는 형국이다. 종횡무진한 기소권과 수사권을 내려놓고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수용하면 그만이지만, 특수부를 동원한 요란한 압수수색을 ‘혐의 없음’으로 끝낼 것 같지도 않다. 촛불시민이 묻는다. 도대체 검찰의 원적(元籍)은 어디인가? 달빛이 공평하지 않았던 ‘고향의 시간’은 이래저래 불안한 가을 격전(激戰)을 예고하고 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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