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인의 恨과 폴란드인의 Zal, 그리고 쇼팽

중앙일보 2019.09.13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1)

그로코프 전투. 러시아의 압제에 반발하여 1830년 일어난 '11월 봉기' 기간 중의 마지막이면서 가장 큰 전투였다. 유화, 1850년경. 폴란드 육군 박물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로코프 전투. 러시아의 압제에 반발하여 1830년 일어난 '11월 봉기' 기간 중의 마지막이면서 가장 큰 전투였다. 유화, 1850년경. 폴란드 육군 박물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폴란드는 오랜 피압박의 역사가 있다. 1772년부터는 이웃한 강대국(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이 폴란드를 나누어 점령했다(1차 분할 점령). 폴란드인은 여러 차례 그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항거는 번번이 힘으로 제압되었고 더 강력한 압박만 불렀다. 잇단 피 침탈과 피압박은 폴란드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폴란드어에 잘(Zal) 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슬픔, 후회, 아픔이라는 말인데 분노, 화의 뜻도 담고 있다. 복합적 감정을 가진 이 단어를 외국어로의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말에는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한(恨)이다. 통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것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처럼 폴란드인에게도, 지나간 오랜 고통의 시간이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울분을 만들었고 그것은 ‘잘’이 되었다.
 
리스트는 처음으로 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쇼팽의 음악을 논했다. “쇼팽은 일시적으로 기쁨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근저에 있는 어떤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 감정을 적절히 표현할 말은 폴란드어 ‘잘’ 외에는 없다. 진정 모든 쇼팽의 음악을 물들인 것은 ‘잘’이었다.”
 
유전학적으로 사람의 기본적 감정은 모계 쪽에 더 가깝다고 한다. 반쪽짜리 폴란드인이었지만 쇼팽의 마음속에는 잘이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 잘을 가진 그는 폴란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쇼팽이 태어나고 활동을 한 때는 시기적으로 폴란드의 민족적 감정이 최고조에 있을 때였다. 후에 폴란드의 국가로 제정되는 군가(軍歌)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가 탄생한 것도 쇼팽이 태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주변 강대국에 분할 점령된 지 한 세대가 지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또한 컸다. 쇼팽의 음악은 시련에 처한 폴란드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폴란드인이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하는 힘도 주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쇼팽의 첫 출판 곡은 폴로네이즈였고, 살아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였다. 모두 폴란드의 전통 춤곡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첫 연주회와 마지막 연주회는 모두 폴란드인을 위한 자선 연주회였다. 쇼팽과 폴란드는 이토록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고, 이것은 폴란드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를 민족적 영웅으로 받드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의 폴로네이즈는 때로는 군가로, 때로는 국가처럼 불리고 연주되었다. 그가 파리에 있을 때, 고국에서 유행하는 애국적 뜻을 담은 시(詩)가 전해 오면, 그는 거기에 노래를 붙였다. 그러면 그 곡은 다시 폴란드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불려서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1844년 파리에서 열린 고향 친구를 위한 작은 음악회에서 쇼팽은 폴로네이즈(작품번호 53)를 연주했다. 동포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렸고, 모두 일어나서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를 합창했다.
 
바르샤바 중심의 와지엔키 공원에 있는 쇼팽 기념비. [사진 Wikimedia Commons]

바르샤바 중심의 와지엔키 공원에 있는 쇼팽 기념비. [사진 Wikimedia Commons]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라핀스키가 파리로 공연 왔을 때 쇼팽은 동포인 그를 파리의 음악계에 소개하고 그가 성공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를 의식한 그가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자 쇼팽은 크게 화를 냈고 그를 멀리하였다.
 
1800년대 후반, 고국을 떠나 대서양 넘어 미국에 정착한 폴란드인들은 외지에서 서로를 위안하고 동포애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합창단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여 노래를 하며 떠나온 고향을 그렸다. 그들은 그것을 ‘쇼팽 합창단’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미국 곳곳에 그 합창단의 전통이 남아있다고 한다.
 
쇼팽 음악의 민족적 의미를 슈만은 잘 이해했었다. 그는 “[쇼팽의 곡에는] 특별하고 강하게 두드러진 민족주의가 있다. 러시아가 그의 지극히 단순한 마주르카 멜로디에 날카로운 발톱이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음악을 금지할 것이다. 쇼팽의 작품은 장미 속에 숨겨진 대포이다.”라고 하였다.
 
러시아도 쇼팽이라는 존재가 갖는 폴란드의 민족적 의미를 잘 알았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쇼팽이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바르샤바를 떠나 파리로 오는 도중 빈에 머물 때 바르샤바에서 반러시아 봉기가 일어났었다. (본 시리즈 9편 참조) 이때 오스트리아 경찰은 쇼팽의 여권을 압수하여 그를 빈에서 꼼짝 못 하게 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요청 때문이었다. 
 

2차대전 중 파괴된 바르샤바 구도심 - 1949년 출간된 바르샤바 홍보책자.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835년 9월, 쇼팽은 뒤에 약혼하게 되는 마리아의 가족과 함께 드레스덴에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그곳에 있는 폴란드인은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저녁 자리에는 작가 요제프 크라신스키 백작도 있었다. 쇼팽은 그 모임에서 자신의 곡 몇 개를 연주했다. 그리고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를 변주해서 연주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누었다. 이 소식은 바로 그곳 러시아 대사관에 들어갔다.
 
이튿날 크라신스키 백작은 러시아 대사관에 소환되었다. 그는 ‘혁명가(歌)가 연주되는 곳에 왜 갔느냐’고 추궁당했고, “쇼팽 같은 선동가는 문밖으로 쫓아냈어야 했다”고 문책을 받았다. 크라신스키의 거주허가는 연장이 거부되었고 마리아의 가족도 드레스덴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러시아에 쇼팽은 당시 최대의 기피 인물이었다.
 
쇼팽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폴란드의 역사를 소재로 한 서사적 오페라를 써주기를 바랐다. 그 오페라를 통해 폴란드 민족의 자긍심이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쇼팽은 오페라 쓰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접었는데, 이유가 확실치 않다. 오페라 같은 대곡의 작곡에 필요한 체력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장점인 피아노를 두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폴란드가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쇼팽과 그의 흔적도 같이 어려움에 부닥쳤다. 1863년, 쇼팽의 유물이 보존된 쇼팽의 누이 집 근처에서 러시아 장군이 습격을 받았다. 러시아 군대는 수색의 명분으로 누이 집에 난입하여 쇼팽의 유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파괴된 유물 중에는 쇼팽의 편지, 아리 셰페르가 그린 초상화 그리고 쇼팽이 처음 연습곡을 작곡할 때 사용한 피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국가로서의 자리를 다시 찾았을 때 그들이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한 것은 쇼팽 기념비를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념비도 폴란드가 겪은 곡절을 그대로 따랐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는데,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난 후 그 쇼팽 기념비를 폭파했다.
 
기념비의 잔해는 모두 수거되어 주조 공장에서 녹여졌다. 나아가 나치 독일은 쇼팽 곡의 연주를 전면 금지했고 듣는 것도 금지 했다. 쇼팽이 갖는 민족적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던 나치 독일은 쇼팽 기념비 파괴가 폴란드인의 용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오늘 날의 바르샤바 구 도심의 야경. 파괴를 딛고 다시 일어선 바르샤바의 야경이 아름답다. [사진 바르샤바 공식 여행안내 웹사이트]

 
2차대전 중 폴란드인들이 입은 피해는 컸다. 특히 2차 대전 막바지에 폴란드인의 반독일 봉기가 일어났을 때, 나치 독일은 야만적으로 바르샤바를 파괴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바르샤바의 인구는 150만명에서 38만명으로 줄었고, 바르샤바 건물은 85% 이상이 파괴되었다. 많은 쇼팽의 흔적도 사라졌다.
 
막대한 피해를 본 폴란드인은 전쟁 후 고심 끝에, 다른 곳에 신도시를 세우는 대신 잿더미가 된 바르샤바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도시를 다시 세웠다. 동시에 그들은 바르샤바 한가운데의 와지엔키(Lazienki) 공원에 쇼팽의 기념비도 원래의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
 
1926년 쇼팽 기념비를 처음 건립하면서 동시에 폴란드는 쇼팽을 기리는 경연대회를 구상하여 이듬해부터 개최하였다. 현재 5년마다 열리는 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피아니스트 경연대회다. 우승자는 최고 피아니스트의 자리로 들어가는 문을 열게 된다. 폴란드인은 그들의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이 콩쿠르를 개최하고 있다. 대회 기간에는 정쟁과 사소한 잡음들이 가라앉는다.
 
쇼팽은 이렇듯 오늘날까지 폴란드 국민을 묶어주고 자부심을 주는 존재이다. 대회 기간 중 관광객과 방문객은 ‘바르샤바 쇼팽 공항’을 통해 폴란드로 몰린다. 세계적 스타 피아니스트의 산실인 이 대회에서 한국인도 좋은 성적을 내 왔다. 2005년에는 임동혁, 임동민 형제가 공동 3위에 올랐고 2015년 대회에서는 조성진이 대망의 우승을 하였다.
 
다음 편은 쇼팽이 폴란드 교포 포토츠카 백작 부인에게 보냈다는 음란한 편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광고 닫기

미세먼지 심한 날엔? 먼지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