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영희의 퍼스펙티브] 트럼프는 한국을 버리고 북한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가

중앙일보 2019.09.12 00:02 종합 22면 지면보기

따돌림당하는 한국 외교

김영희퍼스펙티브

김영희퍼스펙티브

한국이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동화 속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중국 시진핑 주석을 자문하는 현실주의 학파 군의 대표적 인물인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국제관계학원장은 2013년 출간한 『역사의 관성』(한국어판 제목 『세계사 불변의 법칙』)에서 한·중 동맹론을 처음 주장했다. 2012년 그가 비서장으로 있는 세계평화포럼 1차 대회를 열었을 때 당시 부주석이던 시진핑이 참석한 게 우연이 아니다.
 

트럼프, 한·일 갈등 방치하고
북한 탄도미사일 도발을 묵인
한국은 동북아의 외톨이 신세
역사적 맥락서 외교정책 펴야

옌쉐퉁은 한반도의 왕조가 중국의 두 개 왕조와 동시에 동맹을 맺는 양단(兩端) 외교를 한 전례가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때 예쉐퉁에게 e메일로 한반도 왕조의 양단 외교의 전례를 들어보라고 추궁했다. 옌쉐퉁은 고려가 요(遼)·북송(北宋)과 동맹을 맺었고, 그 뒤 조선이 후금(後金)·명(明)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는 답을 보내왔다. 고려와 요·북송, 조선과 후금·명과의 관계를 현대적 의미의 동맹 관계, 따라서 양단 외교라고 할 수 있는가는 학자들 간의, 특히 한·중 학자들 간의 좋은 학술적 논쟁거리다.
 
옌쉐퉁은 2023년이 되면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에 둔 일초다극체제(一超多極體制)가 해체되고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의한 양극체제로 바뀔 것으로 전망한다. 옌쉐퉁은 양 체제 간 경쟁의 승패는 어느 쪽이 동맹국을 많이 확보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데 미국은 42개의 동맹국을 가졌지만, 중국의 실질적인 동맹국은 북한 정도다.
  
“한국, 미국과의 동맹 대열서 이탈 가능”
 
그러나 옌쉐퉁은 1990년 소련 붕괴 후 중국은 동맹국의 숫자가 패권을 좌우하는 세계에서 해양세력이 대륙세력에 압도적인 우위에 선 세계(짐)를 떠안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유라시아의 심장부를 지배하는 세력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지정학의 아버지 해퍼드 매킨더의 시대가, 연안부에 한 발을 걸치고 대양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니콜라스 스파이크만 예일대 교수의 이론에 담론의 윗자리를 내어주었다. 중국이 국력을 기울여 항공모함 건조 등 해군력 강화에 올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23년까지 앞으로 남은 4년에 중국 해군력은 미국 해군력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옌쉐퉁은 한국이 양단 외교를 결단할 시기를 10년이나 그 이상 늦춰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의 한·일 갈등이 중국에 호재를 제공하고 있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적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한국통이자 일본통인 마이클 그린은 미국 의회 산하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hina ECRS)에 참석해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 대열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를 하나의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보도했다.
 
VOA에 따르면 그린은 이런 말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 중 인도·태평양전략에 가장 소극적인 국가이며, 중국은 그동안 한·미 관계를 서슴없이 이간질해왔다.…한국은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과 달리 인도·태평양전략 참여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한·일 간 상황을 고려할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한·일 관계가 위태로운 가운데 한·미 관계까지 틈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린은 트럼프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파기에까지 이른 한·일 갈등을 방관하여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비판한다. 중국이 끄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한·미·일 안보 공조체제 관리의 실패로 한국이 시진핑 주변 현실주의 책사들의 기대대로 한국이 중국과 동맹을 맺는 지경까지 간다면 아시아 역사의 큰 방향이 전환된다. 그린은 8월 30일자 중앙일보 기고에서 미국이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와 일본의 대한국 화이트리스트 제거를 막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조처를 할 수도 있었지만 방관했다고 말한다.
 
첫째,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몇 주 동안이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할 뜻을 비쳤으나, 미국은 명백한 반대나 우려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둘째,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과 일본의 파트너를 초청해서 한·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기회를 놓치고 지소미아는 파기됐다. 셋째, 의회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초당적 사절단을 한국과 일본에 파견할 수도 있었지만, 트럼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국, 자기 할 일 안 한 채 한국 비판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그린의 분석에도 일본 편향을 읽을 수 있다.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은 중립적인 태도로 한·일 갈등을 강 건너 불 보듯 방관하지 않고 “일본 이겨라!” 하는 심정으로 사태를 바라봤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 속속들이 밴 태도다. 지소미아가 파기되자마자 백악관·국무부·국방부는 일제히 한국에 대한 실망을 내쏟았다. 제 할 일은 안 한 미국이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로 동북아 한·미·일 안보 공조체제가 흔들린다고 한국을 비판한다. 일본의 책임론은 한 마디도 없다.
 
한국 정부가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 대사를 소환하여 한국 비판 자제를 촉구하고 26개 미군 기지 조기 반환 적극 추진을 발표하는 강수를 두자 비로소 자제의 기미가 보인다. 이렇게 “노!”라고 말해야 할 때는 시기를 놓치지 말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지난 6월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은 “중·조 우의는 천만금과도 못 바꾼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합리적 안전과 발전에 대한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도 했다. 시진핑은 북한을 확실히 주머니에 넣었다.
 
트럼프도 김정은을 고무하고 격려하는데 많은 신경을 쓴다. 김정은이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해도 “별것 아니다”, “괜찮다”, “안보리 규제 위반 아니다”라고 덮고 넘어간다. 지난 6월 김정은의 친서를 받고는 “훌륭한 내용이 담겨있다”며 “만족한다”고 칭송했다. 한·미 연합훈련이 장사꾼 트럼프에게는 돈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연습 진행 중에 연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재를 뿌린다. 남한이 미국의 동맹인지, 북한이 미국의 동맹인지 혼란스럽다. 양손에 큰 떡을 든 김정은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안중에 없다.
 
북한은 이렇게 세계를 양분하는 세력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반면 한국은 미국·북한·일본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밀려나 동북아의 외톨이 신세가 됐다. 국가안보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 제2차장 김현종, 외교부 장관 강경화 등은 한국 외교를 수렁에 빠트리고 남북 관계는 남북 관계대로 끝이 안 보이는 터널에 빠진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그들은 입만 열면 각자 미국의 카운터파트와 수시로 긴밀한 협의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들의 말이 거짓말임이 들통났다. 한·미 관계의 개념과 실천 전략의 재정립이 급하다.
  
지소미아는 미국의 필요로 해결돼  
 
옌쉐퉁이 2013년 한·중 동맹을 제의했을 때 그 제안은 한 학자의 몽상가적(visionary) 사견으로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장기적으로는 한국과 중국, 북한과 미국의 교차 양단 외교가 낯선 담론이 아니게 되었다. 트럼프에게 동맹국은 미군 주둔 비용의 갈취 대상, 고가의 첨단무기 수출시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래서는 동맹이 온전할 수 없다.
 
물론 트럼프 이후 미국 정부들이 북한에 지금 같은 관대한 정책을 계승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은 작다.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도 언제까지 지금 같을 수는 없다. 각축하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 외교는 확고한 입지를 세워야 한다. 지소미아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의 필요로 머지않아 해결될 것이다. 우리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미국이 아베의 팔을 비트는 것을 즐기면서 지켜보면 된다.
 
동북아 역사는 지금 꽈배기처럼 뒤틀리고 있다. 지금 중국은 한국을 끌고 미국은 한국을 밀어내면서 북한을 끌어안는 기이한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한·중, 북·미 양단 외교가 동화가 아닌 날에 대비할 장기 비전이 필요한 때다. 늦었지만 대통령부터 외교·안보 관료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놓인 상황을 역사적 콘텍스트 안에서 조망하고 파악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콘텍스트를 벗어난 이해는 정책 수립과 집행에 유용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없다.
 
김영희 중앙일보 명예대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