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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용광로’ 맞대꾸·패러디로 식히자

중앙선데이 2019.09.07 00:20 652호 2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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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유민석 지음

여성·성소수자 겨냥 혐오 표현
증오·모욕감 불러 2등 시민화
개인 대응은 한계, 국가가 나서
표현 자유와 품격 함께 지켜야

서해문집
 
“난민들은 테러리스트이거나 미개하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 “당장 기장한테 비행기 세우라고 해.” “민중은 개돼지다.” “동성애자는 성범죄자.” “여학생들은 이 과목을 잘 못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치녀, 똥꼬충, 급식충, 틀딱충, 맘충, 개저씨…한도 끝도 없다. 바야흐로 ‘혐오 전성시대’다. 정치권의 막말대잔치와 중상비방은 너무나 익숙해져 무덤덤하기조차 하다. 혐오는 익명성을 등에 업고 온라인을 숙주로 삼아 독버섯처럼 증식되고 있다. SNS·모바일·인터넷은 오염이 극심해진 지 오래다.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와 메갈리아(남성혐오 미러링) 등 일부 사이트는 ‘혐오의 용광로’가 되고 있다.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은 우리의 이 같은 현실을 개탄하고 이를 철학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며 탈혐오사회를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품위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한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영국 철학자 존 랭쇼 오스틴은 발화행위와 발화수반행위, 발화효과행위라는 3가지 표현행위 범주를 도입했다. 혐오표현의 발화수반행위 중 하나는 모욕이다. “난쟁이가 욕심도 많다”는 장애인 당사자에게 직접 가하는 ‘언어적 따귀’다. 선동적인 표현은 증오를 촉진하는 발화수반행위다. “여성이 취업이 안 되는 것은 그들이 남성에 비해 업무 능력이 열등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표현은 증오를 홍보하고 조장한다.
 
“동성애는 하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금지가 아니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발언은 성소수자를 열등한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그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레이 헬렌 랭턴은 혐오표현이 열등한 신분 계급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국방을 잘 아는 ‘남자’가 외교부 장관을 해야 한다”는 발언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여성을 무시하는 표현이다.
혐오 표현은 대상자를 열등한 존재로 간주해 결국 2등 시민으로 전락시킨다. 2017년 서울 강남역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규탄 집회. [연합뉴스]

혐오 표현은 대상자를 열등한 존재로 간주해 결국 2등 시민으로 전락시킨다. 2017년 서울 강남역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규탄 집회. [연합뉴스]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은 단순히 혐오표현을 논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대항표현’이라는 대응수단의 학문적 논리를 제공한다. 대항표현은 혐오표현에 대한 반박이며 말대꾸하고 맞받아치는 것이다. 불평등한 화자의 언어적 역량을 강화하고 나아가 정치권력의 신장이라는 중대한 기능들을 실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대항표현은 부작용이 없는 매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화자의 타당성 주장을 사실성, 정당성, 진정성의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고 했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당시 여러 가지 미확인 보도가 나돌았으나 팩트체크한 결과 상당 부분이 가짜뉴스임이 확인됐다. “그렇게 권릴 원하면 왜 군댈 안 가나” “합의 아래 관계 갖고 할 거 다 하고 왜 미투해”라는 힙합 노래가 있었다. 여성 래퍼 슬릭은 여기에 대응해 “봤더니 한 오백만 년 전에 하던 소릴 하네. 자기 할머니가 들으셨을 말을 하네” 같은 랩을 담은 ‘이퀄리스트’로 맞섰다. 여성 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인 랩에 표현된 가치의 정당성을 거부한 것이다.
 
갑(甲)인 상사의 모멸적 언어폭력을 을(乙)인 피해자가 폭로한 것도 일종의 대항표현이다.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정말 죽고 싶었다. 저는 사람입니다. 이 새끼, 저 새끼가 아닙니다”라는 을의 게시판 글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모아 갑을 향해 사회적 비난이 향하게 만들었고 가해자는 결국 직위 해제됐다. 아들이 동성애자인 한 어머니는 “지구가 뒤집어져도 엄마는 네 편이야”라며 진솔한 심정을 호소했다. 이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진정성에 변화를 줄 수도 있는 표현이다.
 
패러디 등을 통한 산발적 대항도 효과적이다.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있어” “집안에 남자를 잘 들여야 한다더니”라는 코미디언 김숙의 발언은 전해져 오던 기존의 성차별적 혐오표현에 기생해 부당함을 드러내고 되돌려 주는 맞받아치기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모욕적인 표현에 대한 이런 방식의 재의미부여하기와 재수행하기는 혐오발화자가 목표했던 의도들을 좌절시키며 혐오표현이 전혀 다른 목적에 복무하도록 재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패러디 그리고 풍자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대항표현에는 한계가 있다. 철학자 막심 르푸트르에 따르면, 피해자에게 맞대응하라고 권유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법학자 홍성수는 “혐오표현으로 고통받는 당사자 개인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권위를 가진 국가가 대항표현의 화자로 대신 나서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국가 기관장들이 직접 나서거나 인권단체와 같은 민간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가르치는 공교육 과정을 강화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둥 중 하나다. 그러나 누구를 혐오하기 위한 자유는 마땅히 제한돼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혐오는 언제쯤이나 가라앉을까.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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