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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도 의견이니 존중? 토론은 취향의 박물관 아냐

중앙선데이 2019.09.07 00:20 652호 26면 지면보기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토론의 선결 조건 ‘자기 견해’ 

토론

토론

지성(知性)에 기반한 토론은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나은 답을 찾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아무 말과 헛소리를 자제해 가면서, 증거와 논리에 기반해서 타인과 의견 교환을 하고, 그를 통해 진일보한 지점에 도달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특히 토론하는 법을 익혀야 할 시기에 입시를 위한 암기에 몰두해 온 이들을 토론의 세계로 인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성에 기반한 토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성에 기반한 토론 이뤄지려면
자기변명 아닌 공적 견해 가져야
그럴 때 증거·논리 바탕 의견 교환

비판적이려면 ‘황희 정승’ 포기를
논의의 문제점 지적이 상대 존중

먼저, 자기 견해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토론이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것. 견해가 없으면 토론이 아예 시작될 수도 없다. 꼭 견해를 가져야 하느냐고? 자기는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라고? 견해와 같이 귀찮은 물건은 가지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과연 그럴까? 삶에 의지가 있는 인간들은 대개 자기 인생에 대해 변명하기를 원한다. 자기합리화에 몰두한다. 어떤 종류의 합리화도 거부하는,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악당 조커와 같은 인물은 현실세상엔 거의 없다.
 
그런데 자기합리화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도 안 씻지만 나는 그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과 “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도 안 씻지만 청결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불결한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결한 사람을 청결하다고 공적으로 주장하면, 많은 이들이 분노할 것이다. 못생긴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못생긴 사람을 미남이라고 주장하면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처럼.
  
좋아하는 것과 타당한 것은 구별해야
 
토론의 장은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다른 의견을 긁어모아 취향의 박물관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토론의 목적은, 다양성을 무한정 확보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다양하게 취합된 의견이 만나서 보다 나은 지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과 타당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소리도 의견이니 애지중지해달라고? 모든 견해가 똑같은 정도로 타당하다고? 그건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애지중지해달라는 것과 같다.
 
따라서 토론은 위로를 목적으로 한 대화와는 다르다. 위로를 위한 대화는 따로 있다.
 
“요즘 계속 머리가 아픈데 어떡하지?”
 
“계속 아프면, 병원에 가봐야지?”
 
“병원에 갔다가 큰 병이면 어떡하지?”
 
학술적 토론의 장에서라면, 이와 같은 대화는 비논리적일 것이다. 병원에 갔다고 해서 작은 병이 큰 병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아픈 게 걱정이라면 병원에 가는 것이 타당할 뿐, 저와 같은 반문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일상적 위로의 장이라면, 저 대화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상적 위로의 장에서라면 상대의 취향을 인정해주어서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토론에서는 취향을 넘어선 공적(公的)인 견해가 필요하다. 김소연 시인은 언젠가, “저는 언젠가 수정하더라도 항상 견해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런 태도가 토론 참여자에게 필요하다.  
 
취향을 넘어선 자기합리화가 일정 정도 타당성을 얻어, 마침내 상대를 설득하고자 할 때 비로소 견해라는 것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즉,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 상대에게 비판적이 된다는 것이다.  
 
비판적이 되기 위해서는 속칭 황희 정승이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삼단논법에 비추어 볼 때 이건 말이 안 됩니다”라고 이견을 제시하면, 속칭 황희 정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왜 매사에 그토록 부정적입니까.” 속칭 황희 정승은 오직 비판적인 사람에 대해서만 비판적이다. 견해를 갖지 않으면 맞지도 않겠지만, 틀리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발전의 여지가 없다.
 
비판적인 자기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곧 자기중심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생각해보자.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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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철학자는 누구입니까?
 
B: 이순신 장군이죠.
 
A: 이순신 장군은 철학자가 아니잖아요. 장군이었잖아요?
 
B: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이 누구냐고 물어봤어야지!
 
여기서 B의 문제는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진 전제를 상대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너무 쉽게 전제하므로, 토론에 적합한 이가 아니다.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나머지, 외국 상점에 가서도 다짜고짜 자국 화폐를 들이밀 사람이다.  
 
누군가 전철에서 휴대폰 볼륨을 높이고 BTS의 음악을 감상할 때, 옆자리 승객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이어폰을 사용하라”고 했다고 치자. 그 사람이 “아니 한국 사람치고 BTS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화를 낸다면, 그는 자기 생각을 한국 사람 일반의 생각으로 치환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기가 버겁자, 한국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라는 단계를 거쳐서, 상대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한국인 승객의 이견(異見) 자체가 바로 그의 전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증거와 논리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취향을 공적 주장으로 만들어서 상대에게 개진했다고 치자. 일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기적적인 일이 실제 일어났다고 치자. 그랬다고 해서 상대가 꼭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어지간하면 이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정보마저 왜곡해가며 자신의 주장을 강변한다. 토론을 통한 설득이란, 상대가 상당히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람일 경우에나 가능하다. 돼지 저금통처럼 꽉 막힌 사람을 상대로 재차 설명을 시작하는 것은 못 알아들은 농담을 부연하는 것만큼이나 지겨운 일이다. 특히 토론을 진지한 논의를 위한 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친교 시간으로 간주하는 모임이라면, 누군가 비판적으로 나오는 게 기분 나쁠 것이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빨리 끝내고 술자리에 가서 객쩍은 농담도 나누고, 색소폰도 불어 재끼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이게 뭐람.
  
자기가 틀린 것 인정 못하면 미성숙
 
설득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지성에 기반한 토론을 아예 포기해야 할까? 그저 덕담이나 주고받으며, 알아들을 듯 말 듯한 “돌려 까기”나 시전하고 말아야 할까? 그도 아니라면, 상대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토닥토닥 다독거려야 하나? 우쭈쭈 거리며 달래야 하나? 자신이 소위 모성애나 부성애가 콸콸 넘치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된다. 그렇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면, 상대가 받아들이건 말건, 일단 정확히 상대 논의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길이다. 이것이 막말을 하거나 감정을 섞어 상대를 꾸짖으라는 말은 아니다. 하얗게 벼려진 예리한 논지는 무례하지 않게 상대 논의의 살을 베고, 붉은 칼이 되어 나올 것이다. 토론 상대는 자존심 때문에 막무가내로 버티더라도, 그 토론을 관찰하고 있는 후학(後學) 중에는 그 칼이 어디로 들어가 어디를 베고 어디로 나왔는지를 눈여겨보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았기에, 그들은 어쩌면 미래에 좀 더 나은 토론을 해낼지 모른다.
 
토론을 통해 사실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긴 했으나 자존심 때문에 끝내 그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기 싫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면, 틀린 것을 틀렸다고 인정하면, 그 나름의 쾌감이 느껴지기 마련. 그러나 그 쾌감을 기꺼이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이 성숙하지 못한 범용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박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라고 토론장에서 소리 내어 말해서는 안 된다. “날 감히 무시하지 마라”는 식의 자기변명이나 도착적인 인정욕구로 범벅이 된 말더듬이를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미친 척을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논문을 잘게 찢어 염소처럼 먹든지. 상대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토론자는 갑자기 너그러워지기 시작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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