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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포로는 훗날 우리 선전원 될 것이니 대우해라”

중앙선데이 2019.09.07 00:20 652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3>

반세기 만에 재회한 두핑(가운데)과 김일성. 오른쪽은 중공 총서기 장쩌민. 1991년 10월 10일 난징. [사진 김명호]

반세기 만에 재회한 두핑(가운데)과 김일성. 오른쪽은 중공 총서기 장쩌민. 1991년 10월 10일 난징. [사진 김명호]

1991년 10월 8일, 김일성이 베이징을 찾았다. 총서기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며칠 후 난징(南京)에서 신해혁명 8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강남 유람 겸해 같이 가자.”
 

스탈린, 지원군의 포로 관리에 관심
“포로가 되기 전 계급 존중해야 한다”

“포로 급식은 지원군보다 좋게 제공”
펑더화이, 10년 뒤 친미주의자 몰려

유엔군 포로 관리 담당 지휘관 두핑
은밀히 풀어주고 마오 칭찬 받아

10월 10일 저녁, 난징의 진링(金陵)호텔에서 쌍십절 기념 연회가 열렸다. 김일성도 장쩌민의 안내받으며 참석했다. 당, 정, 군 수뇌들과 악수 나누던 중 자그마한 노인 앞에서 잠시 멈칫하며 놀란 표정 지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나를 기억합니까?” 김일성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두 팔을 벌렸다. “두핑(杜平·두평) 동지를 기억 못 할 리가 있나. 마오 주석의 편지 전해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 사람은 할 얘기가 많았다. 귓속말이 그치지 않았다. 술잔도 수없이 주고받았다. 이튿날, 김일성은 인편 통해 옛 전우에게 보낼 선물 챙기고 난징을 떠났다.
 
한국전쟁 시절 두핑의 공식직함은 중·조연합총부 정치부주임이었다. 지원군 사기 진작과 정치교육 외에 외국인 포로 관리를 정전 담판 마지막 날까지 담당했다. 직급도 높았다. 지휘관 서열 3위였다.
  
스탈린 “유엔군 포로는 중국군이 관리를”
 
성탄절 특식 먹는 미군 포로들. 1951년 12월 24일, 평안북도 벽동. [사진 김명호]

성탄절 특식 먹는 미군 포로들. 1951년 12월 24일, 평안북도 벽동. [사진 김명호]

스탈린은 중국지원군의 포로 관리에 관심이 많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 가오강(高崗·고강), 김일성 등이 올 때마다 신신당부했다. “전장에서는 상대방을 수천 명 살상해도 상관없다. 포로는 죄인이 아니다. 포로가 되기 전 계급을 존중해야 한다. 한 명이라도 죽였다가 들통나면 국제사회가 난리를 떤다. 유엔군 포로는 중국지원군이 직접 관리해라. 한국군 포로는 조선인민군 측에서 담당하는 것이 좋다.” 중국군의 허점도 꼬집었다. “중국은 아직도 훈장과 계급이 없다. 군인의 사기는 훈장과 승진, 일정한 봉급에서 나온다. 장군이나 원수가 필요 없다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발상이다.” 저우언라이가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우리도 공급제도를 월급제로 전환할 계획이었다. 항미원조 때문에 뒤로 미뤘다. 1954년이면 가능하다.” 펑더화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홍군시절부터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급식도 지원군보다 좋은 것을 제공한다.” 10년 후, 이 한마디 때문에 친미주의자로 몰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오쩌둥은 포로 관리를 선전과 연관시켰다. 귀국한 저우언라이에게 지시했다. “포로는 전쟁 끝나면 돌려보내야 한다. 훗날 우리 선전원 될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대우해라. 중국 전통문화 제대로 습득한 사람 물색해서 관리를 맡겨라.” 저우는 염두에 둔 사람이 있었다. 두핑이라면 맡길 만 했다. 이유가 있었다.
 
항미원조 초기 펑더화이도 포로 문제로 고심했다. 1차 운산(雲山) 전투 치른 후 정치공작회의에서 두핑이 의견을 냈다. “맥아더는 우리의 참전을 형식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포로 일부를 풀어주면 맥아더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고 확신한다. 국제 여론도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게 형성된다. 적을 안심시킨 후에 들이치자.” 펑더화이가 손뼉을 쳤다. 보고를 받은 마오도 답전을 보냈다. “너희들 정치 공작이 탁월하다. 한바탕 전투 끝나면 포로 석방하자는 의견에 동감한다. 수시로 석방해라. 앞으로 내 의견 구할 필요 없다.”
 
두핑은 수용소에 사람을 보냈다. “미군 포로 27명과 한국군 포로 76명, 총 103명을 추려라. 간단한 교육과 이발, 목욕을 시키고 새 옷도 지급해라. 여비를 지급하고 반찬도 몇 가지 추가해라.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미군 비행기 피해서 이동해라. 운산 남쪽에 가서 풀어주면 된다.” 마오쩌둥은 기분이 좋았던지 다시 전문을 보냈다. “다음에는 300명 정도 풀어줘라. 경비도 느슨하게 해라. 몇 명 도망쳐도 모른 체해라.”
 
중학 시절 두핑은 공부 잘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예쁜 여학생 따라 농민단체 갔다가 중공과 인연을 맺었다. 학교는 때려치우고 중국 홍군에 자원해버렸다. 겸손과 근면이 몸에 밴, 박학다재한 인재였다. 시와 서법에도 능했다. 중공의 항일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전시회 할 정도로 산수화도 일품이었다. 한마디로 중국의 전통적인 문인이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동북야전군과 제4야전군의 선전과 조직도 두핑의 머리에서 나왔다.
  
두핑, 김일성과 포로 석방·송환문제 협의
 
참전초기의 두핑. 1950년 10월 말, 대유동 지원군총부 인근. [사진 김명호]

참전초기의 두핑. 1950년 10월 말, 대유동 지원군총부 인근. [사진 김명호]

저우언라이는 절차를 중요시했다. 지원군 정전 담판 대표단에 전문을 보냈다. “정치부 주임 두핑을 담판 대표단에 합류시켜라. 업무차 베이징에 와 있다. 직접 통보해라.” 두핑은 개성에서 보낸 전문을 받고 당황했다. 20여 년간 말 위에서 적을 쫓고 쓰러트린 적은 있어도 담판이나 협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두핑을 불러 안심시켰다. “하면서 배우면 된다. 포로 관리와 송환 담판은 네가 적격이다. 여기 마오 주석의 편지가 있다. 지원군 총부에 가는 도중 김일성 만나서 전달해라.”
 
두핑은 주북한대사와 함께 김일성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동북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김일성은 중국어가 유창했다. 통역이 필요 없었다. 마오 주석의 편지와 저우언라이의 건의를 전달했다. “정전 담판에서 포로 석방과 송환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포로는 지원군이 맡고 한국군 포로는 조선인민군이 전담토록 하자.” 김일성은 이견이 없었다. “저우 총리의 의견을 존중한다. 스탈린 동지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 측 포로공작 책임자 장평산과 의논해라.”
 
지원군 총부로 돌아온 두핑은 정전담판 상황이 궁금했다. 담판대표 덩화(鄧華·등화)를 만나러 개성 갈 준비를 서둘렀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덩화는 총부 부사령관실에 있었다. 의아해하는 두핑에게 툴툴거렸다.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차라리 전쟁터라면 직위가 높건 낮건 상관치 않겠다. 미국 놈 꼴 보기 싫어서 담판인지 뭔지 하러 다시는 개성에 가지 않겠다. 외교 업무에 능숙한 비엔장우(邊章五·변장오)와 교대했다. 속이 시원하다. 나는 다시 전쟁터로 가겠다.” 비엔장우는 초대 소련주재 대사관 무관이었다.
 
두핑은 평안북도 벽동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찾았다. 외국인과 한국인 포로를 분리했다.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문을 보냈다. “포로 심문과 회유에 필요한 준재들을 보내주기 바란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훗날 국제무대에서 중국을 대표할 청년들이 참전을 자원(自願)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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