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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동네 안의 시민정치도 중요하다

중앙일보 2019.09.06 00:26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시의 ‘서울민주주의위원회’가 출범한다. 시민이 직접 정책 제안·심의·결정·평가 전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합의제 기구로 위원회 산하에 시민민주주의, 시민참여숙의예산제, 민관협치, 마을공동체를 담당하는 4개 조직, 16개 팀이 구성된다. 올해 편성할 시민참여숙의예산은 1300억원으로 2020년 2000억원, 2021년 6000억원, 2022년에는 1조 원까지 늘어난다. 새로운 온라인 시민 공론장인 ‘민주주의 서울’ 플랫폼도 운영되며 25개 자치구와의 시스템 연계 계획도 들어 있다. 시의회의 의구심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서울시 주요 시민참여 부서들을 하나의 위원회 산하에 모으고 자체적인 예산 및 행정기능을 갖춰 시민의 실질적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확산하려 한다는 점에선 야심 찬 시도라 할 수 있다.
 

청와대·의회 등 제도권 뿐 아니라
마을 안 풀뿌리 현장 정치가 중요
포섭 등 정파성 위험은 조심하되
평소 시민 민주주의 훈련은 긴요

제도권 정치의 주요 이슈들을 제쳐두고 ‘서울의 시민민주주의’를 논하는 게 어쩌면 다소 뜬금없고 한가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 주변과 일상의 ‘동네 안의 시민정치’가 여의도와 청와대의 제도권 정치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정치사를 통하여 위기의 순간마다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고 결정적 국면에서 정치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정치권보다는 시민사회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멀리 동학과 독립운동으로부터 4·19혁명과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와 민주화 이후의 NGO와 시민운동의 부상, 그리고 최근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케 한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시민정치의 흐름에 나타난다.
 
여의도와 청와대 중심의 제도권 정치는 기본적으로 전문 정치인들의 리그로서, 일반 시민은 간헐적·간접적·수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유권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시민정치의 시대다. 식견 있고 비판적인 정치 주체로 등장한 시민은 일상적·직접적·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원한다. 단순 투표 행위뿐 아니라 시위와 저항, 시민 불복종운동, 온라인상의 정치참여 등 과거에는 비관습적(unconventional), 혹 비정상적이라고까지 평가·폄하되던 직접행동이 주류화된다. 또한, 전통적인 의회민주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직접·참여·숙의·디지털 민주주의 등 혁신적 민주주의 실험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변화다.
 
시민정치는 중앙 수준을 넘어 도시, 지역, 마을, 골목 곳곳에서 꿈틀거린다.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관과 협치(協治)하며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풀뿌리 수준의 시민정치, 일명 ‘동네 안의 시민정치’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는 주민조례제정운동, 주민참여예산제, 주민자치회,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역의 각종 협치위원회와 사회적경제 조직 등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예로 필자의 거주지 성북구는 ‘동행(同幸) 활성화 추진위원회’를 설립해 ‘함께 행복한 상생 문화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주민주도형 모델’을 추진한 적이 있다. 계약 당사자를 갑과 을이 아닌 동과 행으로 표기한 ‘동행계약서’를 확산하고 ‘최저임금 시대의 아파트 경비원 고용 안정화를 위한 시민의회’를 개최하여 입주자-관리사무소-경비원 대표 간 최저임금 사회적 협의 모델을 도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풀뿌리 시민정치는 언뜻 생각하기에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 같지만 실제 생각보다 중요하다. 혹자는 마치 수준 낮은 축구를 ‘동네 축구’라 깎아내리듯이 동네 안의 시민정치를 하찮은 ‘동네 정치’ 정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광장의 촛불집회와 중앙 NGO의 시민운동만큼이나 지역 풀뿌리 수준의 시민정치도 중요하다. 퍼트넘(Robert D. Putnam) 교수의 이태리 민주주의 연구는 이점을 잘 보여준다. 이태리 지방자치제도 도입 20년 후 각 지역을 비교 연구한 결과 같은 제도하에서 지역 간 성과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여기서 성패의 관건은 부와 교육 수준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시민공동체 존재 여부라는 것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중앙정부가 마련한 지방자치제도나 지역의 사회경제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며, 바로 ‘동네 안의 시민정치’가 잘 되는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민공동체가 자리 잡은 지역의 시민들은 잘 뭉치고 서로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시민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무기력한 지역엔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시민정치라고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시민참여의 대표성·포괄성·책임성·전문성 등 여러 따져봐야 할 문제가 있다. 정치적 포섭과 정파성의 위험도 조심해야 한다. 시민정치와 시민민주주의는 제도권 정치와 의회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 보완적·상승적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동네 축구’도 잘하기 위해선 적절한 지도 감독과 많은 연습이 필요하듯이, ‘동네 안의 시민정치’도 하루아침에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서울민주주의위원회의 출범으로 동네 안의 시민정치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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