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쉬워진다…‘5% 룰’ 완화에 재계 긴장

중앙일보 2019.09.05 17:33 경제 2면 지면보기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주주권을 더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주식대량보유 보고제도(일명 ‘5% 룰’)를 완화하기로 했다.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는 기관투자자가 주식 보유 목적 등을 공시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선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대한 정부 입김이 더 세질까 우려스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주식 보유목적, 지분 변동 등
기관투자가의 공시 부담 줄여줘
“기업 경영에 정부 입김 세지고
적대적 M&A 무방비 노출 우려”

5일 금융위원회는 ‘5% 룰’ 규제를 개선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6일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상장사 주식 등을 5% 이상 보유하게 되거나 이후 1% 이상 지분 변동이 있는 경우 5일 이내에 보유목적과 변동사항을 보고ㆍ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상장사 주요 주주의 지분 정보를 시장에 공개해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고, 상장사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전북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전북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하지만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ㆍ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면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자, 상세보고 대상(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맡은 보건복지부도 ‘5%룰 때문에 국민연금의 상세한 투자 전략이 공시를 통해 노출돼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금융위에 전달했다.
 
개정안은 이런 요구를 반영했다.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는 기관투자자가 위법 행위를 한 기업 임원의 해임을 요구하거나 정관 변경을 추진하더라도 5일 내에 약식으로 보고하면 된다. 현재는 지분율과 자금 조성 내역 등을 상세히 공시해야 한다. 또 임원 보수 삭감 요청이나 배당 확대 같은 주주 활동은 월 1회 약식으로 공시해도 된다. 금융위는 “정관 변경이 특정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을 겨냥한 것이거나 특정 임원의 선ㆍ해임에 즉각적 영향을 주는 경우엔 여전히 상세보고 대상”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재계에선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적대적 M&A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이 컸다. 대한상의 이경상 기업환경조사본부장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하는 기준이나 목적이 아직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5% 룰부터 완화해버리면 기업은 다른 행동주의 펀드의 적대적 M&A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5% 이상 주식을 보유하는 주주가 생겨도 이를 모르고 있다가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분 5% 이상을 가진 주요 주주의 정보 공개가 뜸해지면서 소액주주에 대한 정보 제공은 소홀해진 면도 있다.
 
지난 3월 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마치고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주주권 행사 시민행동'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월 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정기 주주총회를 마치고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주주권 행사 시민행동'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도 우려의 한 배경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5%룰이 완화된 만큼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과 자본 시장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길이 더 넓어졌다”고 해석했다. 
 
특히, 국민연금은 일본ㆍ캐나다ㆍ미국ㆍ네덜란드 등 해외 주요 연기금이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금운용위원회를 통해 운용되는 것과 달리, 정부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렵다.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20명 중 5명이 현직 장ㆍ차관이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당연직으로 참여한다. 정부의 영향력이 큰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쉽 코드 도입 이후 기업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사결정에 나서고 있다. 대한항공은 올해 3월 고(故)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국민연금이 반대해 조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났다. 국민연금은 이후 SK 최태원 회장에 대해서도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 침해 이력’을 이유로 연임에 반대했다.
 
재계에선 삼성전자도 이번 5%룰 완화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횡령ㆍ배임죄가 확정되면 삼성전자의 지분 9.97%를 가진 국민연금이 약식 보고만으로 이 부회장의 해임을 청구할 수 있게 됐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여론이나 정권의 바람에 따를까봐 걱정하는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주주 이익에 부합하는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원래 목적에 맞는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련·하현옥 기자 park.suryon@joon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