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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민족’ 원했던 차등의결권 도입한다

중앙일보 2019.09.05 05:02 경제 1면 지면보기
정부가 올 하반기에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차등의결권은 대주주 또는 창업자가 가진 주식에 대해 일반 주식(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인정하는 제도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이던 이전 정부 때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면 대기업 오너의 전횡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줄곧 반대했었다.  
 

정부, 비상장 벤처에 한해 허용
스타트업 창업자, 투자 받아도
경영권 잃을까 걱정 안해도 돼
구글 대주주 1주당 10배 의결권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4일  제22차 경제활력대책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차등의결권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경영권 희석 우려 없는 투자유치 활성화를 위해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엄격한 요건 아래에서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겠다”며 “9월까지 구체적인 도입방안을 마련한 후 부처 간 협의를 거쳐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규제 완화를 통해 벤처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차등의결권은 대기업보다도 벤처기업을 위해 더 필요한 제도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벤처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자금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하는데 이때 외부 투자를 유치하면 창업자의 보유 지분 비율이 낮아진다. 창업자의 경영권 가치가 희석되는 셈이다. 벤처기업이 외부 투자를 여러 번 받다 보면 창업자가 투자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장기 전략을 밀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가 지난 4월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우아한형제들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가 지난 4월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우아한형제들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 때문에 국내 대표적인 스타트업 창업가로 꼽히는 김봉진 우아한형제들(서비스 배달의 민족) 대표도 차등의결권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 대표는 올해 4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미국처럼 창업자에게 1주당 1표 이상을 주는 제도가 있다면 보유 주식을 팔아도 경영권 약화 걱정을 안 해도 된다”며 “그러면 기부뿐 아니라 후발 스타트업 지원을 위한 펀드 조성, 사회적 기업 등 가치 있는 일을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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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의결권을 가장 활발하게 활용하는 쪽은 미국의 혁신기업이다. 구글은 2004년 미국 나스닥에 상장할 당시 1주당 10배의 의결권을 갖는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했다. 덕분에 구글 공동창업자들은 16억7000만 달러를 조달하면서도 의결권 지분 63.5%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페이스북ㆍ링크드인ㆍ그루폰 등 급성장한 혁신기업은 차등의결권주를 발행하며 기업공개(IPO)를 했다. 
 
이들 혁신기업의 경영 성과는 일반 기업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4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나스닥 상장사 중 기업가치 2억달러 이상인 기업 110곳을 분석해보니 지난해 이들 기업의 매출은 일반 기업보다 2.9배 높았고, 영업이익은 4.5배 높았다. 고용 측면에서도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혁신기업이 일반기업보다 1.8배 더 많은 직원을 고용했다. 한경연 유정주 혁신기업팀장은 “차등의결권이 이들 성과의 유일한 변수는 아니지만, 차등의결권이 창업자가 경영권 방어에 신경 쓰지 않고 혁신 성장을 이뤄낼 수 있던 중요한 배경인 것은 맞다”고 말했다.  
 
차등의결권

차등의결권

차등의결권을 1920년대부터 금지했던 미국 뉴욕증시(NYSE)도 1980년대 GM을 시작으로 차등의결권을 허용했다.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헤서웨이는 버핏 CEO가 보통주보다 의결권이 1만배 많은 주식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워렌 버핏은 코카콜라ㆍJP모건ㆍGMㆍ존슨앤존슨 등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참여한 기업지배구조 공동원칙2.0(Commonsense Corporate Governance Principles) 선언을 통해 '차등의결권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성명서에 서명했지만, 회사에선 여전히 차등의결권을 통해 강력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컴퍼니나 컴캐스트 등 미디어기업도 차등의결권주를 통해 언론ㆍ미디어의 독립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혁신 기업의 IPO를 유치하려는 전세계 증시도 차등의결권주를 인정하는 추세다. 알리바바를 2014년 뉴욕증시에 뺏긴 홍콩은 지난해부터 차등의결권을 인정했다. 이후 샤오미와 미이투안디엔핑 등 중국의 혁신 IT기업들이 홍콩 증시에 상장했다. 홍콩과 경쟁하는 싱가포르도 지난해부터 차등의결권을 인정했다. 일본은 2005년 개정 회사법에서 차등의결권을 허용한 바 있다.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겸 CEO. [중앙포토]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겸 CEO. [중앙포토]

 
국내에선 여당이 지난해부터 차등의결권 도입에 시동을 걸었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벤처기업에 한해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내용의 ‘벤처기업 육성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올해 2월엔 여당 정책위원회에서도 벤처기업의 ‘성장 사다리’로서 차등의결권이 필요하다며 추진 의사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경제개혁연대·참여연대·경실련 등 차등의결권 반대 측은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과 차등의결권은 별개의 문제”라며 “차등의결권이 결국 일반기업까지 확대되면 경영진이 무능해도 이를 제어할 수 없어 ‘세습경영’이 가능해진다”고 반대한다. 
 
하지만 재계는 차등의결권을 모든 기업에 허용한다고 해도 기존 상장 대기업이 이를 도입하기는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주총에서 주주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가능한 일인데 국내 대기업에서 정관 변경을 통해 차등의결권을 도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혁신성장이 필요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만 고집하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대기업보다도 성장하는 중소·중견기업에 차등의결권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경제에 국경이 없어져 적대적 인수합병(M&A)이 늘고 있는 만큼 기업 스스로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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