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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교통돋보기] 차에서 내리면 당신도 보행자

중앙일보 2019.09.05 00:27 종합 29면 지면보기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세계 최초의 자동차는 1886년 칼 벤츠가 만든 ‘페이턴트 모터바겐(Patent Motorwagen)’으로 알려져 있다. 가솔린 엔진을 이용한, 바퀴가 3개인 삼륜차로 시속 16㎞까지 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도입된 건 27년 뒤인 1903년이었다. 고종 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 미국 공관을 통해 포드 승용차 한 대를 들여왔다. 116년이 지난 지금 국내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300만대나 된다. 숫자로만 보면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동차 문화는 그렇지 못하다. ‘난폭 운전’ ‘보복 운전’ 사례가 끊이질 않는다. 운전자 간에 배려와 양보가 매우 인색한 탓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보행자 보호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최근 이를 입증하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청주시와 대전시에 있는 왕복 4차로 도로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할 때 차량이 정지해 양보하는지를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그나마 제한속도가 시속 30㎞로 비교적 천천히 운행하는 도로에서는 40번의 횡단 시도 가운데 차량이 정지한 경우가 8번이었다. 하지만 제한속도 50㎞인 도로에서는 차량이 보행자를 발견하고 정지한 경우가 40번 중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이 도로에서는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도착해서 길을 건너려는 때부터 실제 횡단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걸린 시간(대기시간)이 평균 37.3초나 됐다. 횡단보도에 접근하는 차량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또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차량에 수신호를 보냈을 때 감속 여부를 확인했더니 절반 가까운 차량(47.1%)이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선진국에선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서 있는 걸 발견하면 우선 정지하는 문화가 널리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단속도 강하게 한다. 보행자 보호가 그만큼 철저하다. 그런데 굳이 외국 사례를 꺼낼 필요 없이 이런 구절 하나만 새겨도 상황은 훨씬 달라질 것 같다. “차에서 내리면 나도 보행자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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