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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격려 못할망정 일하러 가는 것도 친일파로 매도합니까”

중앙일보 2019.09.05 00:02 종합 24면 지면보기

취준생들에게 불똥 튄 한·일 갈등

한·일 갈등의 여파로 청년 실업의 돌파구 역할을 해 오던 일본 기업 취업의 문이 좁아질까 취업준비생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 정부는 일본 기업들이 대규모로 참여할 예정이던 취업박람회까지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일본 취업박람회 장면. [뉴시스]

한·일 갈등의 여파로 청년 실업의 돌파구 역할을 해 오던 일본 기업 취업의 문이 좁아질까 취업준비생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 정부는 일본 기업들이 대규모로 참여할 예정이던 취업박람회까지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일본 취업박람회 장면. [뉴시스]

국제적으로 지명도 높은 대기업에 합격함으로써 취업난에서 해방된 대졸 여성 김수연(가명·23)씨에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내년 4월로 받아둔 입사 날짜만 기다리면 될 느긋한 상황인데도 불안에 떠는 건 그가 취업한 곳이 일본 회사이기 때문이다. 한·일 갈등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일본이 추가 보복 조치로 한국인 대상의 취업비자를 제한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김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는 10월 1일 ‘내정식’이라 불리는 합격자 소집에 참가한 뒤 취업비자 신청을 할 예정이다. 만일 그사이 비자 제한 조치가 내려지면 30여 기업에 이력서를 제출한 끝에 어렵사리 받아낸 합격통지서가 휴짓조각이 된다. 그는 “합격은 했지만 아직은 살얼음판에 서 있는 기분”이라며 “혹시 모르니 실명과 회사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한국인 뽑나” 돌아서는 일본 기업
합격해 놓고도 비자 안 나올까 불안
예정된 취업박람회까지 취소한
정부 조치에 취준생들 분노 폭발

지난 7월 상장 기업인 IT 업체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은 백운영씨의 고민도 비슷하다. 그는 한·일 갈등이 본격화된 뒤로 관련 뉴스를 검색하는 게 일과가 됐다. “채용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인사 담당자의 말에 안심이 됐지만 역시 마음에 걸리는 건 비자 문제다. “비자를 발급받기까지 예전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말이 벌써 떠돌고 있다.
 
김씨나 백씨의 걱정은 아직 일터를 찾지 못한 취업준비생들에 비하면 ‘행복한 고민’이다.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IT 연수를 받아가며 일본 기업의 문을 두드려 온 취업준비생들에게 최근의 사태는 자신들의 뜻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닥친 날벼락이다. 한·일 갈등이 길어지면 일본 기업이 한국 청년 고용에 소극적으로 돌아서 기회의 문은 더욱 좁아질 수 있다.
 
실제로 취업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일본 전문 취업알선업체를 방문했다. 2016년 서울 사무소를 개설한 워크포트는 IT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대형 인력컨설팅 업체다. 8000여개의 일본 내 제휴 기업들 가운데 한국인 직원 채용을 희망하는 업체를 찾아내 일본 취업을 희망하는 한국 청년들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한다. 이 업체의 컨설턴트 하야시 겐타로(林賢太郞)는 “지난 1년간 한국 청년 100여명을 일본 기업으로 취업할 수 있게 주선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구인난이 어느 정도길래 한국인을 채용하나.
“한 명의 IT 엔지니어를 채용하기 위해 20개 기업이 경합한다고 보면 된다. IT 전문 기업뿐 아니라 모든 업종에서 IT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배출되는 인력만으로는 수요를 못 채운다.”
 
그렇더라도 외국인을 고용해서 업무 성과를 거두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물론이다. 전문지식이 필요한 IT 업종이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실제로 인도, 베트남, 중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일본에 와서 일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어학능력을 보이는 것은 한국인이다. 두 나라 언어가 문법 체계가 비슷한 데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발음을 익히는 속도도 월등히 빠르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로 일본 내 반한감정이 높아진 데 따른 영향은 없나.
“솔직히 말해 큰 영향이 있다. 1년 전만 해도 일본 기업들을 돌아다니며 한국에서 열리는 채용 면접행사에 참가해 달라고 영업활동을 하면 대체로 반응들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왜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한국까지 가서 사람을 뽑겠냐고 반문한다. 지금까지 한국 청년을 채용한 경험이 있는 회사는 만족도가 높으니까 계속 참여 의사를 보이지만, 신규 채용 회사를 모집하기가 지금은 대단히 어려워졌다.”
 
합격 통지서

합격 통지서

실제로 한국 청년의 일본 기업 취업자 수는 대략 2010년을 경계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집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일본으로 취업한 인원은 5328명으로 전체 해외취업자의 26.3%를 차지했다. 증가율은 해마다 20% 이상이다. 해외취업 지원업무를 하는 한국무역협회 취업연수실 관계자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국내 대학 졸업자가 갈 만한 양질의 일자리는 사실상 일본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청년실업난에 일본 취업이 하나의 돌파구 역할을 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고용노동부는 코트라, 산업인력공단과 공동으로 이달 하순 개최할 예정이던 ‘일본-아세안 취업박람회’를 취소했다. 전체 참가기업 120개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90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일본까지 가지 않고도 한꺼번에 여러 업체에 원서를 내고 면접까지 볼 수 있어 취준생들이 손꼽아 기다려 오던 행사가 돌연 취소된 것이다. 앞서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하순 서울·부산 등 5개 도시에서 개최한 해외취업전략설명회도 일본 취업만은 쏙 빼고 진행했다. 비판을 의식한 듯 범위를 전 세계로 넓힌 ‘글로벌 일자리대전’을 11월 개최하기로 했지만 일본 기업의 참가 규모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최근 (한·일 갈등) 분위기 때문에 취업을 희망하는 당사자들이 공개적인 자리에 모여서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마치 취준생들의 의사를 반영한 조치란 설명이었지만 취준생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미래의 밥벌이와 꿈이 걸린 취업 기회를 취준생 스스로가 ‘분위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뒤로 미룬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난다.
 
취준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은 허탈함을 넘어 분노에 가까웠다. “54조 추경예산으로 일자리 하나 못 만드는 주제에”라거나 “한·일 관계 악화에 정부가 취업준비생들의 취업길까지 제한해 버리는 것을 보니 피가 솟을 지경”이라며 분통을 드러낸 글들이 올라왔지만, 정부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쓴 사람은 없었다. “박람회가 취소되면 그 대안으로 일본 현지에 가서 취업활동을 해야 하는데 3~6개월 현지 체류비용 아껴 써도 몇백만원 깨집니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우리 부모님들 등골 휘어집니다. 사정상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일본 취업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합니다”며 현실적인 걱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글도 올라왔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불과 얼마 전까지 청년들의 해외 취업, 특히 일본 취업을 장려한다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일이 떠올랐다. 2017년 11월 조현 당시 외교부 2차관은 일본을 방문해 한국 학생들의 취업 활동 현장을 참관하고 일본 정부의 협력을 요청했다. 조 차관은 한국 대학에서 3학년까지 마친 대학생이 학점 교환 프로그램 등을 통해 4학년 과정을 일본 대학에서 이수하고 현지에서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까지 제안했다. 2년도 안 돼 정부는 박람회를 취소하며 오겠다는 일본 기업을 막았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마냥 끌려다닐 수는 없지만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분명히 구별 지어야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람회 취소와 관련해 “그러면 오히려 한국에 곤란해질 텐데”라 말했다고 한다. 한국의 조치에 대한 비아냥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발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언으로 분명해진 사실은 그런 종류의 국내 움직임에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청년은 “일본에 일하러 가는 것일 뿐인데 친일파나 매국노로 매도하는 분위기 때문에 곤혹스럽다”며 “정말 그만 둬야 하는지 망설여지기까지 한다”고 했다.
 
눈을 바깥으로 돌려 국제감각을 키우고 외화벌이도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장려할 일이다. 일본 기업이라 해서 달라질 이유는 없다. 바늘구멍을 뚫고 일자리를 찾은 청년에게 축하와 격려는 못 해줄망정 말 못 할 고민과 죄책감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지 정부가,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돌아봐야 한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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