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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인사이드] “출산으로 국가발전 기여하라” 빈약한 성인지 감수성

중앙일보 2019.09.04 00:04 종합 20면 지면보기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아니한 신체적 조건, 미혼 조건 등을 제시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갑윤, 여성 후보 청문회서 언급
“결혼 안 했죠? 출산율이 문제”
“여성이 출산 도구냐”반발 확산
이해찬 “나경원, 집에 가서…” 구설

 
남녀고용평등법(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은 근로자 채용 기준에서 이렇게 규정합니다. 2일, 해당 법을 만든 국회에서 인사청문회장에 나온 여성 고위공직 후보자에게 “출산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라”는 질의가 나왔습니다. “아직 결혼 안 하셨죠”란 질문에 덧붙여서입니다. 미소를 띠고 답변에 임하던 후보자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습니다.
 
정갑윤 한국당 의원은 2일 청문회장에서 여성비하 논란을 빚었다. 임현동 기자

정갑윤 한국당 의원은 2일 청문회장에서 여성비하 논란을 빚었다. 임현동 기자

이날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기자간담회에 국회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의 청문회장에서 벌어진 일이 뒤늦게 논란이 됐습니다. 정갑윤 자유한국당 의원(울산 중구)은 자신의 질의순서에서 뜬금없이 낮은 출산율을 언급했습니다. 조 후보자가 결혼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으면서였습니다.
  
“여성ㆍ청년 공략하자”면서 논란 자초
 
“후보자, 아직 결혼 안 하셨죠. 우리 한국 사회의 제일 큰 병폐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대한민국 미래가, 출산율이 결국 우리나라를 말아먹습니다. 후보자처럼 정말 훌륭한 후보자가 그걸 갖췄으면 100점짜리 후보자라 생각합니다. 본인 출세도 좋지만, 국가 발전에도 기여해주세요.”
 
조 후보자는 기업지배구조 전문 경제학자로, 여성 최초로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에 지명됐습니다. 뉴욕주립대 교수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거쳐 2005년부터 서울대 경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불법 겸직 논란 등 일부 논란은 있지만, “결혼”이나 “출산” 여부와는 무관한 논란입니다.
 
청문위원인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청문회는 후보자의 자질, 능력, 도덕성을 검증하는 자리인데 결혼이나 출산문제는 이와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조성욱 후보자가 남자라도 이런 발언이 나왔겠느냐”고 지적했습니다. 민주당 여성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국회의원이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본 충격적 여성비하 발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정 의원은 5선 중진으로, 19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냈습니다.
 
박성중 한국당 의원도 같은 날 구설에 올랐습니다.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아내 하나도 제대로 관리 못 하는 사람이 엄청난 예산을 관리할 과기부 장관으로 오는 것은 잘못”이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인순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두 의원의 발언을 거론하며 “여성 고위공직자를 ‘여성’에 가두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공고한가 다시 깨닫는다”고 썼습니다. 민주당은 3일 “어물쩍 사과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라며 “한국당은 두 의원을 엄중 징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날 여성 중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두 사람의 발언이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국회의원부터 여성을 출산 도구로 보는데, 우리가 아이를 낳겠느냐”는 비판이 주였습니다. 일부 커뮤니티에선 정 의원의 사무실로 항의 전화를 했다는 ‘인증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여성뿐 아니라 ‘평등’과 ‘공정’에 민감한 2030세대 전반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22세인 김홍균 바른미래당 청년대변인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테레사 수녀 등을 예로 들며 “여성의 국가발전에 대한 기여가 혼인과 출산이 전제돼야 한단 폭력적 발언은 막말이며, 토사물과 다를 바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자기 편엔 모른척 … 진영 논리 팽배
 
국회에서 ‘성평등’은 매년 소환되는 단골 주제입니다. 특히 선거가 다가올수록 여성·청년 표심 공략에 심혈을 기울이는 각 당에선 놓칠 수 없는 이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국회의 성인지 감수성은 시대의 변화상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도 지난 달 여성비하 논란을 일으켰다. [뉴스1]

이해찬 민주당 대표도 지난 달 여성비하 논란을 일으켰다. [뉴스1]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 한국당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조국 후보자의 청문회를 3일간 하자고 한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를 향해 "정치를 매사 정략적으로 할 거면 집에 가서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고 발언해 구설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말엔 친딘중 베트남 경제부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사람 중 베트남 여성들과 결혼 아주 많이 하는데 다른 여성들보다 베트남 여성들을 아주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내 탓’도 있습니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3월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사퇴하면서 "아내가 저와 상의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다. 제가 알았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말했지만, 직접 은행을 찾아 대출 서류에 서명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각 당의 ‘진영 사고’도 문제입니다. 최근 여권 인사가 잇따라 성차별 구설에 올랐지만, 민주당에선 침묵하는 사례가 잦았습니다. 지난 4월, 패스트트랙 과정에서 임이자 한국당 의원에 대한 문희상 국회의장의 성희롱 논란이 일었을 때도 민주당은 논평을 자제했습니다. 성평등·인권을 강조해온 민주당인 만큼 같은 당 소속 정치인에 대해서도 엄정하고 따끔한 태도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요?
 
여성계에선 “사회적·시대적 배경에 따라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 고위직 기득권일수록,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청년·여성을 말로만 외칠 게 아니라, 당장 스스로 하는 말과 행동이 성차별이 아닌지 되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질책입니다. “출산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라”는 한국당 의원도, 같은 당 소속 정치인의 성차별 논란엔 침묵하는 민주당도 귀담아들어야 할 비판인 것 같습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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