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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일본과의 싸움, 전격전 아닌 고지전

중앙일보 2019.09.03 00:13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몇 년 전 일본인 지인이 일본 외무성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카톡으로 농담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춘 친구였다. 일본 외교관 신분인 그와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물었다. “너는 한국어 자원이니 앞으로 한국과 본부(외무성)만 오가겠구나.” 그런데 그는 “아니”라며 “한국인이 많이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의 일본 영사관도 갈 수 있다”고 답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종군 위안부’ 문제 때문이야. 나 같은 사람이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에 가면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재미동포 사회와 현지 언론에 제대로 전달할 수 있지.” 그가 얘긴 안 했지만,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재미동포 단체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외교안보 부처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교수의 경험담이다. “일본의 외교안보 당국자가 한국에 출장 오면 꼭 내 연구실을 찾는다. 귀국하러 공항에 가는 도중 들렀다는 일본 당국자도 있다. 그들은 동북아시아 정세에 대한 내 의견을 듣고 간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를 상대로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인 지인과 교수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은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아무에게나 공을 들이진 않는다. 저격수처럼 전략적으로 필요한 목표를 정한 뒤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일본 정부를 껄끄러워하는 대상이라면 민간이 대신 나선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출신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만든 일본재단은 각국의 대학과 연구소에 돈을 뿌려 일본 우호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에 조언하는 인사들도 이 재단과 관련됐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수출제한 이후 양국의 대립은 이미 자존심 싸움 단계를 넘어섰다.
 
일본과의 경쟁은 단판에 끝나는 ‘전격전’이 아니다. 지루한 전투가 이어지는 ‘고지전’이다. 많은 국민이 일본 상품 보이콧에 나서는 열정만으론 싸움을 끌고 나가긴 벅차다. 전략과 집요함이 열정을 뒷받침해줘야 한다. 일본에 이기려면 우리가 일본에 배워야 할 점들이기도 하다.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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