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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전환시대의 논리』에 멍든 한·미동맹

중앙일보 2019.09.03 00:12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우리의 한·미 동맹은 안녕하신가. 8일 만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대사 소환에 이어 미군기지 조기 반환 요구까지, 정부가 미국을 자극하는 일들을 단숨에 해치우는 걸 보고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얼마 전 워싱턴에 다녀온 전문가는 “미 관리들 입에서 문재인 정권 초기에 즐겨 쓰던 ‘노무현 때도 견뎠다’는 말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때보다 현 정권의 정책 방향을 훨씬 심각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 친중 논리에 영향받아
안보 위한 중국 편승 전략은 위험
'한·미 동맹이 국익'임을 명심해야

청와대 핵심인사가 “동맹도 국익에 앞설 수 없다”고 말하는 판이니 미국의 우려도 어쩌면 당연하다. 청와대 측 발언은 한국이 동맹관계에 안달하지 않는다는 걸 알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에겐 이런 조치 등이 미국과는 결별하고 중국 품에 안기려는 ‘원미근중(遠美近中)’ 정책의 일환으로 읽힌다.
 
문재인 대통령의 글을 보면 중국에는 애정을 듬뿍 주면서 미국은 탐탁지 않게 보는, 뿌리 깊은 편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는 책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대선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진보적 언론인이었던 고(故) 리영희 한양대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고 상대편은 무찔러 버려야 할 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겨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의 운명』)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이 책에서 미국의 정의롭지 못함을 절감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미국엔 발톱을 세웠던 반면, 이 책은 베트남전을 ‘식민지해방전쟁’으로 규정하며 북베트남과 중공에 호감을 나타냈다. 이런 인식대로라면 제국주의적 미국과는 결별하고 중국과 손을 잡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대선 전 공약집 격인 『사람이 먼저다』에도 이런 사고의 흐름이 감지된다. 여기서 그는 ‘균형외교’를 논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에 더 많은 무게를 뒀다.
 
그렇다면 ‘원미근중’ 노선은 바람직할까. 결론적으로 정통적 동맹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무모한 선택이다. 동맹이론에 따르면 강대국을 이웃으로 둔 중소국에겐 두 개의 선택지만이 존재한다. 타국과 손잡고 강대국에 맞서는 ‘동맹(alliance) 전략’, 아니면 그쪽 편이 되는 ‘편승(bandwagoning)전략’이 그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들은 멀리 떨어진 나라와 손잡고 주변 강대국을 견제하는 게 낫다고 가르친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먼 나라와 힘을 합쳐 가까운 나라를 친다’는 술책은 동맹전략의 핵심과 맥을 같이 한다.
 
여러 면에서 봐도 주변 강대국 편에만 서서 안전을 꾀하려는 건 큰 잘못이다. 최대 약점은 강대국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대신 오만가지 간섭과 요구에 시달릴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설사 당장은 가만 놔두더라도 리더의 생각이나 정권이 바뀌면 어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주변 강국을 믿었다 비참한 운명을 맞은 사례는 숱하다. 18세기 말 폴란드는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압력에 못 이겨 그녀의 옛 연인을 왕으로 앉힌다. 폴란드의 새 왕은 러시아가 든든한 후원국이 될 거로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정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짜고 폴란드 영토를 점령해 버린다. 2차대전 후 친소련 노선을 택한 핀란드는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각종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소련을 비판하는 책이나 영화조차 금지될 정도였다.
 
서해를 가운데 둔 한국과 중국은 운명적으로 여러 분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불법어로, 미세먼지, 영공침범 등 지금도 숱하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간 중국이 얼마나 고압적으로 나왔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미군이 주둔 중인데도 이런 판이니 한·미 동맹이 무너지면 어떤 수모를 겪어야 할지 암담하다. 불행히도 떠오르는 초강대국 중국을 바로 곁에 둔 우리로서는 ‘한·미동맹이 국익’임을 잊어선 안 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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