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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 살해범이 집유로 풀려났다···피해자 울리는 '합의의 덫'

중앙일보 2019.09.03 00:04 종합 14면 지면보기
지난해 8월, 21살 여성 A씨는 길거리에서 남자친구에게 무자비하게 맞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남자친구 염모(23)씨는 감옥에 가지 않고 풀려났다.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되면서다.
 

합의금 주고 ‘선처 탄원서’ 얻어
가해자가 돈으로 감형받는 셈
여친 얼굴 함몰시킨 폭행범도
2심에서 형량 절반으로 줄어

판결문에 드러난 염씨의 폭행은 잔혹했다. 그는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보였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의 얼굴을 수차례 가격했다. 머리를 식당 출입문 바닥 모서리에 찍어 A씨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다.
 
염씨에겐 상해치사죄가 적용됐다. 살인죄보다는 형량이 낮지만 징역 3년에서 30년까지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염씨가 피해자 유족에게 합의금 1억 5000만원을 지급했고, 유족 측에서 피고인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냈다”며 집행유예로 그를 풀어줬다.
  
친족 성폭력, 가족 강요로 합의 많아
 
합의한 뒤 가해자 얼마나 감형됐나.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합의한 뒤 가해자 얼마나 감형됐나.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지난 7월 여자친구의 얼굴을 함몰시킨 정모(39)씨도 2심에서 형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정씨는 말다툼을 하던 도중 여자친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얼굴을 수 차례 때린 혐의(중상해)를 받았다. 이 일로 여자친구는 얼굴뼈 대부분이 골절됐고 뇌손상으로 인한 정신장애가 왔다.
 
1심은 정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면서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2심은 정씨의 형을 2년으로 줄였다. 피해자 가족이 합의금 5000만원과 매월 150만원을 일정 기간 받는 조건으로 정씨를 선처해달라고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돈으로 선처받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사람을 죽여도, 중상해를 입혀도, 성폭행을 저질러도 피해자와 합의하면 처벌 수위가 낮아진다. 이는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피해자 측의 ‘처벌 불원’ 의사를 감형 요소로 두는 데 근거한다. 합의 자체가 양형인자는 아니지만 가해자가 합의금을 주는 대가로 피해자 측에 ‘처벌 불원서를 내달라’고 요구해 감형받는 식이다.
 
피해자와 가족들은 왜 합의를 할까. 피해를 회복할만한 다른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가해자로부터 받은 물리적·정신적 피해를 돈으로 보상받으려면 민사 소송을 한번 더 거쳐야 한다. 김영미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는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를 엄벌한다고 죽은 내 딸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더 이상 가해자와 얽히지 말고 보상받고 끝내자는 심리에 빠른 합의를 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친족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족들의 강요에 못 이겨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쓰기도 한다. 신진희 변호사(법률구조공단 피해자국선전담)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나라에서 지원해줘도 그 돈이 어차피 가해자인 가족한테 들어간다고 지원금도 안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아버지나 계부가 구속되면 가족 전체가 생계 곤란을 겪게 되는데 피해자가 어떻게 엄벌해달라고 재판부에 말하겠느냐”고 말했다.
  
법조계 “합의제, 피해자 회복 위해 필요”
 
살인·성폭력 같은 강력 범죄에서 이를 어디까지 적용할지도 논란거리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법의 단죄를 피하기 쉽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다. 피해자가 바라지 않아도 가해자가 법원에 공탁금을 맡겨놓으면 이를 ‘처벌 불원’으로 해석해 감형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며느리를 2년 가까이 성폭행한 시아버지가 5000만원을 낸 뒤 형량이 징역 7년에서 5년으로 줄어 논란이 됐다.
 
그럼에도 합의 제도 자체는 피해자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게 법조계의 의견이다. 합의 제도는 원래 형사 재판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더 잘 반영하기 위한 취지다. 엄벌주의에서 벗어나 가해자가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려면 합의가 곧 선처로 이어지는 구조를 더 촘촘히 메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혜경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단순히 합의했다는 게 핵심이 아니라 범죄자가 자신의 범행을 후회하고 피해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하였는지가 양형의 참작사유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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