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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 전남 화순 능주 조광조 유배지의 영정. [중앙포토]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 전남 화순 능주 조광조 유배지의 영정. [중앙포토]

 

[유성운의 역사정치]

“조광조 등을 보건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세력을 만들어 서로 의지하여 권력이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위를 속이고 사사로운 감정을 행사하되 꺼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詭激·말과 행동이 사리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과격함)이 버릇이 되게 하여,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방해했습니다. 이로써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 분개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 죄를 분명히 다루소서.” (윤자임)
 
“이들이 늘 한 짓은 다 정의에 핑계를 댔으므로 그 죄를 이름 붙여 말하기 어려우니, 짐작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우두머리로 합니까?”(정광필)
 
“조광조를 우두머리로 하라.”(중종)
 
『중종실록』에 기록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밤 주요 대신들의 긴급 호출로 시작된 이 사건은 오랫동안 학계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국왕의 오른팔이자 개혁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조광조와 그 세력(기묘사림)의 몰락이 워낙 극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흔히 조광조가 추진한 공신 명단 축소가 훈구파의 반발을 사면서 기묘사화가 벌어졌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11월 15일 밤의 상황을 보면 탄핵의 제1사유는 패거리 문화입니다. 조선 전기엔 용납할 수 없는 중죄에 해당했습니다. 조광조는 왜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을까요.
 

조선시대 개혁의 아이콘 조광조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졸렬한 급진주의자에서 숭고한 이상주의자까지 후대에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하지만 조광조가 출발부터 많은 주목을 받은 사림계의 기대주였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는 28세 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자 학문 수준이 높다는 평이 자자했습니다. 명분론을 강조하는 김종직-김굉필의 정통을 이은 성리학자로서 사림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하기도 전에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종6품인 조지서(造紙署)의 사지(司紙)로 임명돼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후 문과 시험에 합격한 뒤로도 엘리트 코스를 걸었습니다. 급제 직후 청요직으로 꼽히는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4년 만에 지금의 검찰총장 겸 청와대 민정수석을 합친 격인 사헌부 대사헌(종2품)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조광조는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공신 명단 축소 등 간단치 않은 정책도 전격적으로 추진했는데, 중종의 전폭적인 지원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됐습니다.
 
“조광조가 말하자 중종은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서로 진정으로 간절히 논설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환관이 촛불을 들고 가자 그제야 그만두었다”(『중종실록』 14년 7월 21일)는 기록은 중종과 조광조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입니다.
 
이 때문에 국왕이 조광조 일파를 처벌하라고 했을 때 일부 대신은 “저 사람들은 임금께서 다 뽑아서 현직과 요직의 반열(班列)에 두고 말을 다 들어 주셨는데 하루아침에 죄주면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비슷합니다”라고 못마땅함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조광조는 왜 과거 대신 현량과를 추진했나

정암 선생 적려 유허비. 기묘사화로 유배된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그를 기리기 위한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적려란 귀 양살이하던 오두막집이란 뜻이고, 유허비는 기념할만한 옛 자취에 세운 비를 말한다. [중앙포토]

정암 선생 적려 유허비. 기묘사화로 유배된 정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그를 기리기 위한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적려란 귀 양살이하던 오두막집이란 뜻이고, 유허비는 기념할만한 옛 자취에 세운 비를 말한다. [중앙포토]

조광조의 주요 정책으로 배우면서도 실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 현량과 실시입니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지만 결과적으로 기묘사림이 추진하는 개혁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했기에 몰락을 알리는 전주곡이 됐습니다. 
 
중종 13년 3월 왕을 만난 자리에서 조광조와 기묘사림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문장만으로는 좋은 인재를 구할 수 없습니다. 학문이 풍부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추천받으면 대현인(大賢人)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 한양에선 홍문관(弘文館)과 육경(六卿) 및 대간(臺諫)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종실록』13년 3월 11일)
 
과거제는 좋은 인재를 뽑는 데 한계가 있으니 추천제로 보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천거를 받아 후보자를 모은 후 특별한 형태의 시험을 보아 합격자들에겐 정상적인 문과 합격자와 동일한 특권을 갖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국 한(漢)나라 때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한 적이 있다”는 근거도 들었습니다.
 
2016년 제23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가 10월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희궁에서 열렸다. 응시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있다. 조선시대 갑오경장 때 폐지됐던 과거제는 폐지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었던 1994년에 재현되기 시작해 올해로 23년을 맞이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6년 제23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가 10월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희궁에서 열렸다. 응시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있다. 조선시대 갑오경장 때 폐지됐던 과거제는 폐지된 지 정확히 100년이 되었던 1994년에 재현되기 시작해 올해로 23년을 맞이하고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과거제는 이전과 비교했을 때 체계적이고 공정한 인재 등용 시스템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과거제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림파는 현량과를 요구했을까요.
 
도학 정치를 주창하던 사림파는 과거 시험의 당락을 좌우하는 문장력을 사장학(詞章學)이라며 천시했습니다. 사장(詞章)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을 말합니다. 성리학이 강조하는 심성에 대한 연구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허용하다 보니 사장학을 하는 선비들은 다양한 분야에 관해 관심을 뒀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엔 풍수나 의학, 수학 등도 중시했고, 과거제에도 적극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조선 중기 등장한 사림파는 경전 해석을 통해 우주와 인간 심성의 본질에 관해 관심을 뒀고, 자신들의 학문을 경학(經學)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런 사림파의 기준에선 과거제로 들어온 인사들은 그저 문장을 다루는 기술만 뛰어날 뿐이었고, 과거제로는 진정한 학문의 깊이를 알기는 어렵다고 봤습니다. 문장력에 대해선 “외교문서를 다룰 때나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의 스킬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1568년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열여섯 살 어린 임금인 선조(재위 1567~1608)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책을 올렸다. 성학십도는 구원의 도정을 열 장 그림에 담았다는 의미. 퇴계는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성리학에서 핵심이 될 만한 내용을 응축해 담았다.[연합뉴스]

퇴계 이황(1501~1570)은 1568년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열여섯 살 어린 임금인 선조(재위 1567~1608)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책을 올렸다. 성학십도는 구원의 도정을 열 장 그림에 담았다는 의미. 퇴계는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성리학에서 핵심이 될 만한 내용을 응축해 담았다.[연합뉴스]

그래서 사림파와 훈구파는 과거제와 그 기반이 되는 사장을 놓고 팽팽히 맞섰습니다. 
 
“조광조 등이 이학(理學)을 귀하게 여기고 사장(詞章)을 천하게 여겨 매번 경연에서 '임금은 시를 지어서는 안 되고 신하에게 지어 바치게 해서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12년 9월 9일)
 
“근래 과거를 위한 공부를 정학을 해치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송나라의 주자와 정자도 모두 과거를 거쳐서 나온 사람입니다. 과거를 통해 선비를 뽑더라도 어진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장과 경술은 똑같이 중시해야 마땅하며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중종실록』 12년 8월 30일)  

 
지금으로 치면 대입 수시파와 정시파의 대결이랄까요.
 

[유성운의 역사정치]

현량과, 누구를 위한 추천제였나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장이다.[안동=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장이다.[안동=프리랜서 공정식]

 
반발이 나오자 조광조 세력도 한발 물러섰습니다. ①각지에서 추천을 받고 ②이들만 대상으로 특별한 테스트를 벌여 문과 급제자와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자. 위에서 언급한 중종 13년 조광조 세력의 제안은 당초 100% 추천제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일종의 절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제안에 대해 우려가 적지 않았습니다. 과정과 결과의 불공정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남곤 같은 재상은 “(과거 중국에서 실시했을 때) 천거된 사람들은 천거한 사람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정작 재주가 있던 사람들이 누락됐다”는 반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이번에도 조광조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519년 봄 28명이 선발됐고, 합격자에겐 문과 급제자와 동일한 홍패(紅牌·급제 증서)가 수여됐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우려했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재상이었던 안당의 세 아들이 모두 합격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안당은 이조판서 시절 성균관 학생이던 조광조를 천거해 시험도 안 보고 종6품에 올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전력 때문인지 안당은 훗날 기묘사림의 지원을 받아 우의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당의 세 아들이 합격자 28명에 모두 들어간 현량과의 결과는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종실록 [사진제공=문화재청]

중종실록 [사진제공=문화재청]

 
당시 사관은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안당의 세 아들이 일시에 급제하였으므로, 임금이 술과 고기를 많이 하사하여 하례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영광으로 여겼으나 식자(識者)들은 이것이 안씨의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형윤이 말하기를 ‘이것이 참으로 급제한 것이라면 매우 좋겠지만…’ 하였으니, 이번 천거과(薦擧科)가 공도(公道)로 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중종실록』 14년 8월 30일)
훗날 기묘사화가 벌어졌을 때 안당은 기묘사림과 뜻을 같이 했다는 이유로 처형됐습니다. 안씨의 복이 아니었다는 사관의 평은 ‘예언’이 된 것이죠.
 
이 외에도 현량과에서 장원을 차지한 김식은 조광조와 절친한 오랜 친구였고, 한 달 만에 홍문관의 부제학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현량과에 합격한 28명 중 절반이 당시 주요직이라 불린 대간이나 홍문관에 배치됐습니다.
 
결국 훗날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세력을 만들어 서로 의지하여 권력이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위를 속이고 사사로운 감정을 행사하되 꺼리지 않았다”는 탄핵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습니다.
 

기묘사림은 중소지주 출신 개혁세력?

조선 유학의 대표적 성현인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시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은 그를 잇는 영남학파의 중심지이자 한국 유교의 대표적 명소중 하나이다. [중앙포토]

조선 유학의 대표적 성현인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시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은 그를 잇는 영남학파의 중심지이자 한국 유교의 대표적 명소중 하나이다. [중앙포토]

학계에서 사림과 훈구세력에 대한 이분법은 오랜 논쟁의 대상입니다. 통상 훈구세력은 서울 출신, 기득권층, 대지주, 공신세력이고,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세력은 지방 출신의 중소지주로서 성리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도덕 정치와 공론을 중시한 신진세력으로 비교됩니다.
 
최근에는 이에 대해 많은 질문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일단 사림파에 대한 묘사가 조선 건국세력인 신진사대부와 흡사하다보니 '개혁 vs 수구'라는 이분법의 틀에 끼워맞추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사에 대해 통계적으로 접근해 많은 시사점을 안긴 에드워드 와그너 하버드대 교수는 기묘사림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현량과 시험의 합격자를 전수조사해 통상적 이미지와 다르다는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급제자 28명의 가계와 사회적 배경(조상의 문과급제 여부 및 관직 등)을 조사한 결과 28명 중 23명이 유력 가문 출신이며, 급제자의 53%가량이 오히려 훈구파라고 부를 만한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지역적으로도 19명이 서울 거주자였습니다.
 
훗날 기묘사화에 희생된 조광조 일파도 비슷한데, 1차 희생자 8명 중 6명은 서울 사람이며, 이전에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조광조만 하더라도 고조부는 건국 공신의 주요 인사였고, 증조부-조부-부친이 모두 대대로 한양에서 벼슬을 지낸 쟁쟁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광조와 기묘사림은 어쩌면 요즘 말하는 ‘강남 좌파’의 원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김굉필, 정여창, 이황, 이이 같은 대표적 사림파 인사들을 봐도 서울과 지방에 수많은 노비와 전답을 보유한 부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와그너를 비롯한 최근 연구들은 사림파와 훈구파의 차이는 성리학에 대한 믿음의 정도에서 비롯될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회적 기반을 갖춘 계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출신 배경이나 혼인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토지 소유와 같은 경제적 기반을 놓고 볼 때도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어려우므로, 이들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달리하는 계급이나 계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계승범, 『중종의 시대-조선 유교화와 사림운동』)
 
또한 성종~중종 대 75년간 89회 시행된 문과 급제자는 모두 1595명인데, 이 가운데 1120명이 문화유씨 족보에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문화유씨는 49명(3%)입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최고 지배 엘리트층이 혼인이나 혈연으로 촘촘히 엮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에드워드 와그너 『조선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 계승범 ‘같은 책’에서 재인용)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딸 입시문제와 재산 관리 문제로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검찰 수사와 청문회를 통해 시시비비가 가려지겠지만 조 후보자가 그동안 SNS에 남긴 말(言)을 통해 구축했던 개혁적 이미지는 타격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조국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386(또는 586)’으로 불리는 민주화 운동세력이 이미 기득권화 되었으며,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군사 정부 시대의 기득권층과 닮아가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이번 사태가 한국사회를 한층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계승범 『중종의 시대-조선 유교화와 사림운동』, 김범 『조선전기 훈구사림세력 연구의 재검토』, 이정철 『기묘사화 전개과정과 중종의 역할』, 에드워드 와그너·이훈상 『1519년 현랑과-조선 전기 역사에서의 위상』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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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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