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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돌려달라"···물대포·최루탄·불길 치솟은 홍콩시위

중앙일보 2019.08.31 18:30
홍콩 사태의 분수령을 이룰 시위로 주목을 받은 8월 31일 집회, 즉 ‘8. 31 시위’는 시들할 줄 알았다. 29~30일 이틀간 시위 지도부가 대낮에 테러를 당하고 학생 지도부와 입법회 의원이 무더기로 체포되는 등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 시위대가 31일 완차이 도로 한가운데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불길이 번지고 있다. [유상철 기자]

홍콩 시위대가 31일 완차이 도로 한가운데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불길이 번지고 있다. [유상철 기자]

8. 31 시위를 기획한 민주인권전선은 집회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홍콩 시위는 그렇게 수그러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1일 낮 12시 홍콩 기독교인이 집회를 연다는 완차이 서던 구장으로 향했다.

재야단체가 8월 31일 시위 취소했지만
홍콩 번화가 센트럴 가득 메운 시위대
13주 연속의 주말 시위 이어가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로 진압
시위대는 도로 가운데 맞불로 맞서
9월에도 홍콩 시위는 계속될 전망

12시 반부터 모이기로 했다는 데 벌써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홍콩 동방일보(東方日報) 기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평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기자도 많았다. 로이터 카메라 기자는 캄보디아에서 어제 왔다고 했다.
홍콩 시위대가 31일 밤 완차이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불이 번지고 있다. [유상철 기자]

홍콩 시위대가 31일 밤 완차이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서 불이 번지고 있다. [유상철 기자]

지난 6월 초 이래 13주 연속되고 있는 주말 시위로 홍콩에서 일하던 기자가 녹초가 되는 바람에 아시아 권역의 기자를 동원해 순환 근무를 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홍콩 시위는 우리와 다른 점이 적지 않았다.
우리 경우엔 집회나 시위가 열리면 대개 모임을 기획한 지도부가 무대에 올라 일장 연설을 하고 또 구호를 선창하면 따라 하는 게 보통인데 홍콩 시위에선 도대체 시위를 주도하는 이를 찾기 어려웠다.
공개적으로 앞에 나서 말하는 이가 없다. 누군가가 구호를 외치면 따라 하고 또 어느 사이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완장을 찬 이들이 있다. ‘관찰원’ ‘홍콩 인권 감찰’ ‘긴급 구조대’ 등 다양하다.
총과 방패로 무장한 홍콩 경찰이 31일 과거 홍콩 총독부로 향하려는 시위대의 앞길을 막고 있다. [유상철 기자]

총과 방패로 무장한 홍콩 경찰이 31일 과거 홍콩 총독부로 향하려는 시위대의 앞길을 막고 있다. [유상철 기자]

이들은 어디까지나 시위 돌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지 시위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도 홍콩의 시위대는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홍콩 경찰이 왜 이제까지 시위대 지도부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했다.
서던 구장에 모인 이들은 이날 홍콩의 죄인을 위한 기도를 갖겠다고 했다. 죄인은 케리 람 행정장관을 뜻했다. 이어 구호가 터졌다. “홍콩인 힘내라”와 “내 눈을 돌려달라”는 외침이 이어졌다.  
“내 눈을 돌려달라”는 건 지난 시위 때 경찰이 쏜 물체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은 여성을 대신한 말이다. 그래서인지 시위대가 들고 있는 그림은 케리 람 행정장관이 오른쪽 눈에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홍콩 시위대가 31일 완차이 도로 한 가운데를 부셔 경찰과 맞설 돌을 만들고 있다. [유상철 기자]

홍콩 시위대가 31일 완차이 도로 한 가운데를 부셔 경찰과 맞설 돌을 만들고 있다. [유상철 기자]

오후 1시가 넘자 집회에 서던 구장 스탠드를 가득 메웠던 인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장에서 나와 중심가 센트럴을 지나 과거 홍콩 총독부가 있는 어퍼알버트 로드까지 행진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시위대 위로 드론이 떴다. 경찰이 띄운 것이다. 시위대로부터 야유가 쏟아졌다. 오후 2시 30분 이들이 옛 홍콩 총독부 부근에 도착했을 때 홍콩 특유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0여분 정도 세찬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이들의 행진을 막지는 못했다. 찬송가, 홍콩인 힘내라, 내 눈을 돌려달라는 노래와 외침이 계속됐다. 그러나 총독부와 미국 총영사관이 자리한 어퍼알버트 로드로 향하는 길목은 경찰이 막아서고 있었다.  
방패와 총 등으로 무장한 경찰을 향해 한바탕 야유를 퍼부은 시위대는 천천히 방향을 바꿔 홍콩 최고 중심가 센트럴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사 송고를 위해 전철을 탔다. 센트럴에서 완차이까지는 두 정거장.  
8월 31일 홍콩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손에는 오른쪽 눈에 피를 흘리는 케리 람 행정장관의 그림이 들려 있었다. 지난 시위 때 경찰이 쏜 물체에 맞아 눈을 잃은 여성을 대신한 것이다. [유상철 기자]

8월 31일 홍콩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손에는 오른쪽 눈에 피를 흘리는 케리 람 행정장관의 그림이 들려 있었다. 지난 시위 때 경찰이 쏜 물체에 맞아 눈을 잃은 여성을 대신한 것이다. [유상철 기자]

오후 4시 완차이 전철역에 도착하니 놀라운 모습이 펼쳐졌다. 오후 1시 때 완차이를 출발한 인파가 다인 줄 알았는데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퉁뤄완 방향에서 완차이로 밀려와 다시 센트럴로 향하고 있었다.  
세 시간이 넘게 완차이 앞길을 새로운 인파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센트럴로 향했던 시위대는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며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8월 31일 홍콩의 시위는 여전히 건재한 것이다.
백색 테러와 검거 선풍이 불고 장대비가 쏟아졌지만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홍콩인의 정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날이 저물며 시위는 폭력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청년들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검은 옷이다.  
홍콩 경찰은 마침내 센트럴과 애드머럴티 등 중심가를 점령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와 최루탄 발사를 시작했다. 시위대를 가려내기 위한 파란 색감의 물대포가 뿌려지기도 했다.
홍콩 시위대가 31일 완차이 부근에서 철근 구조물을 두드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유상철 기자]

홍콩 시위대가 31일 완차이 부근에서 철근 구조물을 두드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유상철 기자]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센트럴과 애드머럴티에서 밀린 시위대가 완차이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다. 공사장에서 가져온 각종 집기가 도로를 막고 갑자기 바리케이드에서 불길이 일었다. 시위대가 사기를 돋우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는 또 도로를 부셔 벽돌을 준비했다. 레이저 불빛이 어지러이 불길 사이를 뚫고 이리저리 건물을 비추는 가운데 건물 철골 구조물을 두드려 북소리 효과를 낸다. 불은 더욱 커지고 기자의 카메라 세례가 터진다.
밤 8시가 가까워지자 폭동 진압 경찰이 완차이를 향해 서서히 진군해 내려왔다. 해산을 명령하는 경찰 마이크가 가까워짐에 따라 시위대의 함성도 커졌다. 한동안 경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다시 동쪽인 퉁뤄완 쪽으로 밀려났다.  
8월 31일 홍콩의 시위는 여느 때와 같이 물대포와 최루탄, 도로 한 가운데 불길이 검은 먹구름을 한 동안 뿜어내는 상황을 연출했다. 시위대 요구에 홍콩 정부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홍콩 시위는 9월로 접어드는 다음 주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홍콩=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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