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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들에게 건네는소소한 위로, 승리한 패배자들

중앙일보 2019.08.31 09:00
아버지의 강요로 복싱을 시작해 '어쩌다 챔피언'이 된 마이클 벤트. "링 위에 오르는 게 싫다"던 벤트는 패배로 자유를 얻었다. [사진 넷플릭스]

아버지의 강요로 복싱을 시작해 '어쩌다 챔피언'이 된 마이클 벤트. "링 위에 오르는 게 싫다"던 벤트는 패배로 자유를 얻었다. [사진 넷플릭스]

게임에는 패자가 있지만 인생에는 패자가 없다. 이 다큐는 다양한 스포츠 스타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메시지를 전한다. 웃고 행복한 사람만 가득찬 것 같은 세상이지만 도처에 숱한 '승리한 패배자'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우리일 수 있으며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는, 작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에게 추천 
난 루저인가?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축구, 농구는 물론 개썰매까지 섭렵하고 싶은 스포츠광  
 
이런 사람에겐 비추천  
누가 누굴 위로해? 난 승자인걸.  
미지근한 다큐는 영 별로인걸?  
 
와칭(watchin')
 
와칭(watchin')은 중앙일보 뉴스랩이 만든 리뷰 서비스입니다. 넷플릭스 리뷰 모아놓은 곳, 믿을 만한 영드·미드·영화 추천을 찾으신다면 watching.joins.com으로 오세요. 취향이 다른 에디터들의 리뷰를 읽고, 나만의 리뷰도 남겨보세요.  

삽화가 감성, 소소한 위로  

폭풍오열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감동 다큐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는 승자! 다 잘 될거야' 식의 영혼없는 위로도 아니다. 20~30분 분량의 짧은 에피소드 8개로 구성된 다큐는 보는 내내 옅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영혼 충만한 소소한 위로를 건넨다.  
애니메이션 재연은 무거움을 덜어낸다 [사진 캡처 ]

애니메이션 재연은 무거움을 덜어낸다 [사진 캡처 ]

감독이자 유명 삽화가인 미키 두지의 색깔은 다큐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억지 감동을 위해 위기와 운명의 순간을 비장하거나 극적으로 재연하지 않는다. 대신 두지가 그린 감각적인 일러스트로 불필요한 무거움을 한껏 덜어냈다. 주인공들은 아찔했던 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현재의 행복을 더 담담히, 그러나 진정성있게 풀어낸다.  
 

다양한 루저의 스펙트럼

우리는 세상의 기대와 내가 원하는 삶의 괴리에 끊임없이 갈팡질팡한다. 성공과 부, 평판까지 모두가 발목을 잡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한채 세상의 기대에 억지 부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다큐 속 루저들은 담대하게 세상의 기대 건너편으로 움직였다.  
 
다큐에 등장하는 루저(라고 불렸지만 실제는 '승리한 패배자'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노력형도 있고, 괴짜형도 있고, 불운형도 있다. 더러는 공감되고, 더러는 불편하다. 그러나 제각각인 것만 같은 이 루저들이 떠나는 여정의 목적지는 같은 곳을 향한다. 진정한 자아.   
NBA 스타보다 묘기꾼이 체질에 맞는 블랙잭 [사진 캡처 ]

NBA 스타보다 묘기꾼이 체질에 맞는 블랙잭 [사진 캡처 ]

아버지의 강요로 복싱을 시작해 어쩌다 챔피언이 됐지만 패배로 자아를 찾은 마이클 벤트(1편), 가족을 내팽겨치고 도전과 모험을 일삼는 마우로(5편), NBA급 실력을 길거리 농구에서 탕진하다 농구 퍼포먼스로 행복을 찾은 무늬만 백인 '블랙잭(7편)까지. 모두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인생은 메달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어떤판정(3편)'의 주인공인 수리야 보날리가 시청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프랑스의 흑인 피겨선수였던 보날리는 최고의 기술을 갖고있음에도 석연찮은 판정으로 번번히 우승을 놓친다.   
수리야 보날리는 나가노 올림픽에서 금지된 기술, 백플립으로 모두를 열광케했다. 단, 심판들만 빼고. [사진 캡처 ]

수리야 보날리는 나가노 올림픽에서 금지된 기술, 백플립으로 모두를 열광케했다. 단, 심판들만 빼고. [사진 캡처 ]

선수로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나가노(1998년)에서 그녀는 인종차별에 멋지게 한방을 먹였다. 뒤로 한바퀴 공중제비를 도는 금지된 기술, 백플립을 선보인 것. '인생을 바꾸려고 메달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는다. 그녀는 메달 대신 자유를 획득했다. 패배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기억되길 기대하기 보다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널리 회자(?)되는 이 말 속엔 세상사의 비정한 이치가 담겨있다.  동시에 1등에 대한 갈망과 기억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런 욕망인들에게 전직 프로골퍼인 장 방 드벨드(8편)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다.  
 
장은 세계 랭킹 125위 만년 무명선수였다. 1999년 디오픈 우승 문턱까지 가며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지만 보기좋게 미끄러졌다. 그러곤 두번다시 우승 근처에도 못갔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두고두고 이불킥을 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을까. 하지만 장은 카메라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프로골퍼보단 유소년 코치가 적성에 맞는 장 방 드벨드 [사진 캡처 ]

프로골퍼보단 유소년 코치가 적성에 맞는 장 방 드벨드 [사진 캡처 ]

"1907년 디오픈 챔피언이 누군가요?"
 
짧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제작진은 '모른다'는 답을 내놓는다. 세계 최고 권위의 디오픈 챔피언도 100년이 지나면 잊히고 묻힌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길 바랐지만 그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다면, 혹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장의 질문을 떠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기억되지 못함'은 루저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아, 참고로 장은 유소년 골프 지도자로 살고 있다. 비록 세상이 인정하는 승리를 따내지 못했지만, 선수 때보다 더없이 큰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장주영 기자 jang.jooyoung@joongang.co.kr  
 

제목  승리한 패배자들(Losers)
감독  미키 두지  
출연  마이클 벤트, 장 방 드벨드 외  
등급  15세 이상  
평점  IMDb 7.7  에디터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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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영 장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