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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 휘말리고 차남 성추문, 휴가지서 발 못 뻗는 엘리자베스 여왕

중앙일보 2019.08.31 07:44
스코틀랜드에 있는 여왕의 여름 별장 발모랄성 [영국 왕실 홈페이지]

스코틀랜드에 있는 여왕의 여름 별장 발모랄성 [영국 왕실 홈페이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발모랄 성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 여왕을 포함한 왕실 가족은 여름이면 기온이 서늘하고 공기와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동부 에버딘셔의 발모랄 성에 모인다. 왕실 소식을 전하는 현지 매체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여러 거처나 집무실을 갖고 있지만 발모랄 성에 있을 때 특히 편안해 한다고 소개했다.
 

매년 스코틀랜드 발모랄성서 여름 나기
올해 의회 휴회 요청하러 정치인들 방문
노딜 불사 위해 존슨 총리 여왕 끌어들여
앤드루 왕자 17세와 성관계 스캔들 의혹
좋아하는 발모랄서도 고민 거리 안 줄어

 93세인 여왕은 그곳에서 많은 애완견과 산책을 즐긴다. 과거에는 승마를 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꿩 사냥을 하는 모습도 외부로 전해지곤 했다. 웨스트민스터나 버킹엄궁 등 런던에서 공적 업무에서 벗어나 발모랄에서 여왕은 오붓한 시간을 여름 내내 보내온 것이다.
발모랄성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빈. [AP=연합뉴스]

발모랄성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빈. [AP=연합뉴스]

 
 하지만 올여름 엘리자베스 여왕은 마음 편하게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뜻을 전달하러 제이콥 리스모그 보수당 하원 원내대표 등이 발모랄 성까지 찾아온 게 대표적인 요인이다.
 
 존슨 총리는 의회를 한달가량 문을 닫게 해 “헌법을 모욕했다"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연합(EU)과 결별하는 브렉시트를 10월 31일에 무조건 시행하겠다며 아예 의회를 장기간 못 열게 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존슨은 이를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을 끌어들였다. 영국 의회는 회기가 끝나면 일정 기간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여름 휴가철이 끝난 후 각 당의 전당대회를 여는 기간도 있어 휴회했다가 다시 모였다. 회기를 다시 시작할 때 여왕이 의회에서 연설하는 게 관례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여왕의 연설 날짜는 총리가 잡는데, 존슨이 이를 뒤로 밀어버렸다. 10월 14일에서야 여왕의 연설 날짜를 잡아 브렉시트 시한까지 의회가 자신의 계획을 막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여왕은 존슨 총리의 요청을 즉시 수용했는데, 여왕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고 BBC는 설명했다. 실제 여왕이 브렉시트를 앞두고 의회를 오랫동안 열지 않는데 대해 어떤 생각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관례와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 정치에서 여왕은 총리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존슨 총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BBC는 “만약 여왕이 존슨의 의회 장기 휴회 요청을 거절했다면 영국은 더 큰 헌법적 격랑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라며 “정당하게 선출된 정부의 권고 대신 왕실이 사적인 본능에 따르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또 여왕이 총리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야권의 손을 들어주는 정치적 의사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부담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AF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AFP=연합뉴스]

 
 의회 휴회를 둘러싼 논란은 그래서 여왕에게 심각한 불편을 안겨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석에서 브렉시트를 둘러싸고 영국 정치권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BBC에 따르면 왕실의 우선적인 희망 사항은 브렉시트 논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데, 존슨이 여왕을 결과적으로 정쟁에 끌어들인 상황이다.
 
 보수당 출신인 존 메이저 전 총리가 존슨의 조치가 헌법에 어긋난다며 법원에서 따져보겠다고 나섰고, 실제 스코틀랜드 법원에서는 다음 주 청문 절차가 진행된다. 여왕은 특권을 행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여왕의 결정을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총리의 건의가 헌법에 배치되는지를 따져보는 과정이다.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가 열리고, 다음 주 야당을 중심으로 '노 딜(no deal)' 브렉시트를 막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기 때문에 여왕도 근심을 떨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 [AP=연합뉴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 [AP=연합뉴스]

 여왕의 또 다른 골칫거리는 차남 앤드루 왕자다. 자살한 미국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을 고소한 버지니아 주프레가 17살에 앤드루 왕자와 강제로 성관계했다고 주장했다. 주프레는 앤드루 왕자에게 “본인이 한 일을 알고 있다"며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했다. 일부 언론은 역대 왕실 스캔들 중에서 앤드루 왕자 건이 가장 심각한 스캔들이 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로 미국 맨해튼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엡스타인은 숨진 채 발견됐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법정에서 증언에 나선 주프레는 기자들과 만나 엡스타인이 앤드류 왕자와 성관계를 하도록 세 차례나 강요했다고 말했다.
 
 앤드루 왕자는 최근에는 젊은 여성의 가슴을 더듬은 적이 있다는 의혹에도 휩싸였다. 영국 버킹엄궁은 텔레그래프를 통해 공개한 성명에서 앤드루 왕자가 친구였던 엡스타인의 성범죄 혐의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며 감싸기에 나섰다. 버킹엄궁은 미성년자 성관계 의혹에 대해서도 “왕자는 인간에 대한 착취를 개탄하는 사람이다. 그런 행위를 묵과하거나 참여 혹은 독려했다는 의혹은 모순된다”고 했다.
 
지난 11일 스코틀랜드에서 일요일 교회에 다녀오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앤드루 왕자 [AP=연합뉴스]

지난 11일 스코틀랜드에서 일요일 교회에 다녀오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앤드루 왕자 [AP=연합뉴스]

 여왕이 머무는 발모랄 성에서는 앤드루 왕자가 딸과 함께 방문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그와 이혼한 전처도 성을 찾았다. 올해 발모랄 성을 찾으면서 윌리엄 왕세손 가족이 노리치 공항에서 저가 항공을 타고 떠난 것도 이목을 끌었다. 세 자녀까지 가족 5명의 1인당 항공료가 10만8000월가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행보는 동생인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가 프랑스 니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가수 엘튼 존이 제공한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구설에 오른 이후 나왔다.
  
예년 같으면 발모랄에서는 여름 내내 화목한 모임이 이어졌겠지만, 올해는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는 악재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괴롭히고 있다.
영국 정부가 의회 장기 휴회를 요청한 날 발모랄성의 문을 경찰이 지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정부가 의회 장기 휴회를 요청한 날 발모랄성의 문을 경찰이 지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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